언제부터였을까, 지겹도록 건조한 일상의 반복이 시작된 것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꽤나 오랫동안 나는 이 생활을 지속해 왔고 지금은 그 생활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마치 오랜 기간을 만난 연인 사이에는 더 이상의 설렘과 풋풋함이 없는 것처럼. 그래서 그런거였을까. 오래 만난 연인에게 늘 찾아온다는 권태기처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건조하고 팍팍한 일상에서 한 번 벗어나 보고 싶다, 뭔가 말랑말랑하고 몽글몽글한 새로움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또 일상에 문득 찾아온 권태기가 점점 사그라들 때쯤, ‘딩동’하는 핸드폰 알람음이 울렸다. 가끔씩 눈요기용으로만 사용하는 SNS 친구신청 알림메시지였다.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한 내 인간관계에 새로울 사람이라고는 없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친구 신청한 그의 이름을 보니 어렴풋이 머릿속에 들어오는 세 글자, ‘조수호’.
그였다.
작년 여름, 한 9개월 전쯤이었지 아마. 회사 일정이 꼬이는 바람에 원하는 날짜에 휴가를 받지 못하고 남들 다 여름을 즐기고 난 후에나 느지막이 3일 휴가를 받았었다. 그래도 나름 휴가인데 하는 마음에 아무 계획 없이 덜컥 기차표부터 끊어 놓았다. 목적지는 파주, 지방에 사는 나로서는 최고의 결정이자,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나의 파주로의 반짝 휴가는 시작되었다. 여행은 늘 언제나 그렇듯 향하는 곳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공존한다. 적어도 나에게 파주는 그런 도시였다. 잘 알지 못하는 곳에 대한 두려움과 그래서 더 많이 보고 느끼고 싶다는 벅찬 욕심을 안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여행에는 음악이 빠질 수 없단 생각에 준비한 라즈베리필드의 ‘청춘열차’라는 노래를 듣기 시작했다.
혼자라도 왠지 기분이 좋은 여행길 / 설렘 가득 안고 달려가고 있어 / 낡은 철길 위로 맑은 하늘 바라보네 / 내 마음은 바람소리에 맞춰 춤을 춰
노랫가사가 내 마음의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행복하고 행복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도착한 파주의 모습은 파랬다. 파아란 하늘과 초록나무로 가득 찬 이곳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제일 먼저 발걸음이 향한 곳은 말로만 듣던, 아니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너무나도 아기자기하고 예뻤던, 파주출판단지였다. 좋아하는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엄마, 돈, 책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책은 그런 존재다 내게, 그래서 더 ‘파주’라는 곳이 특별한지도 모르겠다. 과연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어떤 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행운이었다.
‘행운’, 아마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조수호’. 그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출판단지 안에 있던 지혜의 숲이었던가. 온통 책으로 뒤덮인 그 곳에서 나와 그는 처음 만났고, 서로 통하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의 미묘하지만 애써 담담하게 건넨 첫마디는 ‘저.. 책 좀 추천 부탁드려도 될까요?’였다. 그리고는 시작된 우리의 이야기는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계속되었고 급기야는 다음날 임진각까지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알고 보니 그는 파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그럼에도 일부러 그러는 건지, 진짜 어리숙한 사람이여서 그랬는지 임진각을 가는 데에도 꽤나 애를 먹었다. 그래도 참으로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과 만나 함께 서로의 마음과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것은 꽤나 신선하고 즐거운 일이였다. 그렇게 3일이라는 시간을 그와 파주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어색함이 감돌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 두근거리고 떨렸던 나의 여행. 그는 더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지만 이제는 현실의 나로 돌아와야 할 때였다. 기차역까지 바래다주면서 그는 말했다. ‘은하씨, 우리 또 만나요. 또 만나고 싶어요.’라며, 그렇게 나는 떠나고, 그는 남았다. 그리고 그 뒤로 간간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연락을 주고받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점점 연락을 하는 횟수가 뜸해졌고, 절대로 마르지 않을 것 같은 이야깃거리도 다 써버린 듯 형식적인 인사들만 주고받다가...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버렸다.
그런데 지금 딱, 내가 일상에서의 나른함과 권태로움을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기라도 한 듯 먼저 손길을 내민 그에게 나는 어떤 대답을 주어야 할까. 그냥 친구신청이라기엔 너무나도 오랜만이고, 그렇다고 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에도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곧, 떠올랐다. 그를 위한, 아니 그와 나를 위한 명쾌한 대답을.
떠나기로 했다. 다시. 내가 좋아하는 책이 있는,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있는 그 곳, 파주로.
갑자기 지난 여름의 기억들이 하나 둘 내 가슴 속에 와 닿으며 또 다시 새로운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그래서 예전의 설렘과 풋풋함, 새로움이 가득한 나 자신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이번에도 파주행 기차표를 덜컥 끊어버렸다.
해운대에 내려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날이 갈수록 날짜 세는 데에 무심해지고 있으니, 오늘 날짜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하루를 보내는 일이 다반사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부정적인 일이 아니다. 내가 쓰는 시간을, 내게 남겨진 시간을 세는 것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꽤 인지도가 있다. 추억을 남기려 내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는 꼭 배경으로 노을 진 바다를 함께 그려준다. 그것도 붉은 빛이 아니라 노란 빛깔로 노을 져 가는 바다를 말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단순한 서명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여기에는 나만 알고 있는 사연이 있다.
무작정 그림을 그리겠다고 해운대로 내려왔다. 집안의 반대가 심하여, 어렵게 들어간 미술 대학을 졸업하지도 못하고 경영을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집을 떠나던 날, 어머니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꼭 안아주셨다.
“넌 어디 가서든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나를 더 붙잡지 못하고 이 말만을 전하실 때의 그 심정이 어떠했는지, 나는 아직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꼭 성공하겠다는 막연한 한 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집을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차에 부산 쪽에 살고 있는 친구가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캐리커처를 그려 주는 사람이 많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고작 몇 시간 뒤에 해운대에 닿을 수 있었으나, 해변에서 캐리커처를 생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은 내게 쉬이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다. 무턱대고 사람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아쿠아리움 앞에 앉아 자리를 폈다가 싸움이 붙을 뻔한 적도 있었다.
어느 흐린 날, 백사장 끝까지 밀려난 나는 그 날의 장사를 포기하고 해변을 따라 걸었다. 집을 떠나면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제일 먼저 그리워진다더니,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지금쯤 뭘 하고 계실까. 분명 비어있는 내 방에 들어가 내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시고 계실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꽤 멀리까지 와 버렸다. 친구들과 몇 번 놀러 온 적이 있어 해운대 번화가의 지리는 꽤 잘 아는 편이었지만, 해수욕장을 벗어난 적은 없었다. 작은 목조계단이 보이고, 어느 새 동백섬 입구를 마주하게 된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동백섬으로 들어갔다.
앞길이 깜깜할 때 바다를 보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망망대해 앞에 서 있으면 내 자신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를 절로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순수 미술을 전공하겠다는 사람이 이만 원을 받고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일을 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었다. 기분만 우울해지는 것을 괜히 올라왔다고 생각하며 다시 계단을 내려가려던 그 때, 내 앞에 인어공주가 나타났다.
바위 위에 올라앉은 그녀는 아름답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대신,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발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손에는 구슬이 하나 들려 있고, 옷자락 아래로는 물고기의 꼬리가 숨겨져 있다. 무슨 연유인가 하니, 이 공주의 외할머니의 나라는 바다 아래의 수정국이며, 어머니의 나라는 바다 건너 나란다국이라 하였다. 공주가 이 동백섬에 시집을 와서 왕비로 살다가 두 나라를 몹시 그리워 하니, 그녀가 가진 황옥에 달 밝은 밤이면 두 나라가 비쳤다고 한다.
나는 청동상으로 만들어진 이 인어공주의 모습에서 기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때마침 해가 저물기 시작했는데, 흐린 날의 일몰은 새빨간 홍옥이 아닌 노오란 황옥 빛깔이었고, 그 공주의 이름도 모국의 이름을 따서 황옥이라 하였다. 황옥 공주의 쓸쓸한 등 위로 노랗게 타는 노을빛이 내리니, 나는 그때야 이 바다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운대 앞바다가 아닌, 고향을 그리워하는 황옥 공주가 앉아 있는 동백섬 앞바다를 말이다.
집을 떠난 지 한 달. 나는 그날에서야 어머니에게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물이 핑 돌았지만, 쉽게 돌아가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화가로서 당당하게 내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나는 그림마다 노랗게 타는 노을을 그려 넣었다. 찌푸리고 있던 인상을 펴자 다른 그림쟁이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하루하루, 느리지만 차근차근 내 자리를 잡아 지금에 이르렀다.
인적이 드물어지는 시간이면, 가끔 황옥 공주 옆에 가 앉아 함께 황옥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황옥에는 가끔 우리 집이 비치곤 한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그녀에게, 이제는 내가 되려 위로를 건넨다. 돌아갈 곳이, 그리워 할 곳이 있기에 바다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흰 눈발이 내리는 겨울이면 어김없이 군고구마 장수와 붕어빵 장수가 눈에 띤다. 집 앞 작은 골목 앞에 있는 따끈한 붕어빵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골목에 고소한 붕어빵 냄새가 나면 출출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어 흰 봉지에 군고구마와 붕어빵을 가득 담아가며 함박미소를 지었다.
"붕어빵 천 원어치에 몇 갭니까?"하고 물으면 "세 개 인데 네 개 드릴게요."하며 따뜻한 마음까지 덤으로 주시곤 했다.
아버지는 유난히 이곳 붕어빵을 좋아하셨다. 내가 간혹 빈손으로 들어오는 날이면 아버지는 거기 붕어빵 장수 오늘은 쉬나? 하며 내심 붕어빵장수의 안부까지 물으시곤 하셨다. 아버지 덕분에 붕어빵 포장마차의 단골이 된 나는 가끔 붕어빵 장수와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붕어빵 장수는 한쪽 눈이 불편한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붕어빵을 휙휙 돌릴 때면 그 노련함에 박수를 칠 뻔한 적도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버지를 위한 붕어빵을 사가려고 포장마차에 들렀다.
“또 오셨네요.”
“네. 오늘은 날씨가 더 추워진 것 같아요. 오래 서계시면 감기 드시겠어요.”
“저는 불 앞에 있는데요 뭐. 추운 줄도 몰라요. 오늘도 아버지 붕어빵 사드리려고 오셨나봐요?”
“저야 그렇지요 뭐,”
“허허. 그런데 아버님은 붕어빵 질리지도 않으신대요?”
“질리긴요. 언제는 깜빡하고 빈손으로 가면 섭섭해 하신다니까요. 그래서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요기 포장마차 열었나 안 열었나부터 확인한다니까요.”
“아무튼, 매번 참 고마워요. 단골이 있다는 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추우실텐데 이거라도 하나 드시고 계세요.”
“아저씨는 몸도 불편하시고 추우실텐데 어쩜 매년 겨울이면 하루도 안 빼먹고 이렇게 나오세요?”
“춥지요. 추운데 이렇게라도 안하면 집에 혼자 계시는 노인네가 더 추울 것 같아 이렇게 몇 푼이라도 벌어 가는 거지요. 그래야 집에 불도 피우고 생선 한 마리라도 사가지요. 이런 말도 부끄럽지만.”
“부끄럽긴요. 우리 동네 효자가 여기 계셨네.”
“효자라니 당치도 않아요. 그저 살아계실 때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드려야지 하는 마음이지요.”
그렇게 말을 하는 아저씨의 장갑은 많이 낡아있었다. 목장갑은 붕어빵을 돌리는 꼬챙이 때문에 닳아 구멍이 나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일찍 들어가 보세요.”
“네, 안 그래도 오늘 아버지 생신이라 일찍 들어가려고 했어요. 남은 붕어빵은 아버님께 드리는 제 선물이에요. 단골분께 드리는 제 선물이요,”
아저씨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흰 봉투 가득 붕어빵을 담아주셨다. 아저씨의 한쪽 눈은 찡그러져 있었지만 어느 때보다 밝은 웃음을 지으며 손수레를 끌고 오르막을 올라갔다.
혼자 계실 아버지를 위해 여느 때보다 밝은 웃음을 지으며 오르고 또 올라갔다.
양손 가득 붕어빵을 들고 집에 들어가니 아버지가 모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신다.
“무슨 붕어빵을 이리 많이 사왔노? 붕어빵 털어 왔나?”
“네. 붕어빵 장수가 아버지께 드리는 선물이래요. 아버지가 좋아하시니까요.”
“그래? 고맙네. 고마워.”
아버지는 달고 따뜻한 붕어빵을 머리부터 덥석 드셨다. 품에 품고 와서 그런지 붕어빵에서는 아직도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뉴스에서는 비닐하우스에서 딸기를 따던 노인의 갑작스런 사망을 보도했다. 사실상 장마나 태풍이 왔다고 해도 기승을 부리는 더위는 쉽게 가실 줄을 몰랐고 사람이고 식물이고 더위에 지칠 수밖에 없었다.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는 곳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택배 배달 일을 하는 나는 유난히 더위에 도출이 잦았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옷이 땀에 젖었다 말랐다 해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아내는 내 땀냄새를 보고 돈냄새라고 했다. 아내에게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었지만 순수하던 아내가 속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했다.
일하던 중 유일하게 쉴 수 있었던 곳은 시원한 백화점이나 좋은 건물에 배달을 가는 것이었다. 운이 좋으면 시원한 음료를 건네기도 했고 수령인이 한 10분만 기다려 달라고 하면 못이기는 척 시원한 곳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기다려주기도 했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무더웠다. 아마도 폭염주의보가 사흘째 이어지던 날일 것이다. 온 몸에 주름진 곳이라면 땀이 끼어있었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고 쉴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수십 개 아니 수백 개의 노란색 박스를 옮겨 담았다. 오로지 아내와 딸아이를 생각하면서였다.
순간 핑.
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을 끔뻑이며 정신을 차려보려고 했으나 이미 하늘은 노란빛을 띠었고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 두 개로 겹쳐 보이다 이내 검은 빛을 띠었다. 악 소리 한번 질러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상자박스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고 그 다음은 기억이 없다. 눈을 떠보니 하얀색 천장이 보였고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아내의 얼굴이 보였다. 아내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고 내가 눈을 뜬 것을 확인한 뒤 이내 약간의 혈색이 도는 듯 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내의 얼굴임을 알면서도 잠시 동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나는 왜 여기에 누워있는지.
“당신 괜찮아요? 정신 잃고 쓰러졌었는데.”
순간 하늘이 핑 돌더니 이내 쓰러졌던 모양이다. 건강만큼은 자신한다고 생각했는데, 택배 일 하면서 절로 운동한다고 탄탄해진 허벅지를 자랑했는데 이내 쓰러진 모양이었다.
“쓰러졌다고? 얼마나?”
“쓰러지자마자 누가 바로 보고 신고해줘서 다행이었어요. 지금 한 한 시간 정도 지났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그래? 이제 괜찮아. 그나저나 배달은 어떻게 한담.”
“지금 배달이 문제에요? 당신 열사병 때문에 쓰러진 거래요. 날이 계속 덥더니만.”
“열사병?”
쓰러진 이유가 과로이거나 빈혈인 줄 알았는데 열사병이었다. 그날따라 덥더라니.
퇴원 수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약을 처방받고 며칠간은 뜨거운 곳에서 지나치게 운동을 하거나 일을 하는 것을 삼가라고 했다.
지나치게 운동을 하거나 고온 환경에서 일을 삼가라니. 일을 바로 쉴 수는 없었다. 그저 요령껏 땡볕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시원한 물을 자주 마셔주는 것 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출근 준비를 위해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데 아내가 웬 봉투를 쓱 내민다.
“이거 입고 다녀요. 이거 최고 좋은 거라 비싸게 주고 산거니까.”
아내가 내민 것은 모시양말과 손수건, 개량한복처럼 생긴 모시옷이었다.
“한산 모시? 모시를 입고 출근하라는 거야?”
“모시는 뭐 노인네들만 입으라는 법 있어요? 요즘 젊은이들도 시원하고 가볍고 통풍 잘된다고 다 입고 다녀요. 당신 또 쓰러지면 어떻게 해? 그러니까 그냥 입어요.”
아내는 내가 쓰러졌을 때 꽤나 놀란 모양이었다. 아내가 준비해 준 옷을 한번 입어본다. 바람이 분 것도 아닌데 시원했다.
살갗을 스치는 까슬까슬한 느낌이 좋았다.
오랜만이네, 새댁!
반가운 말투로 인사를 하는 아주머니 말투에 아무런 반박도 없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실제로 오랜만에 들른 것도 아니었고 새댁 꼬리표를 달만큼 풋풋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어시장으로 직접 올 때에는 시어머니의 부름을 받을 때이다. 결혼 준비 즈음 친구들은 시댁과의 거리는 최대한 먼 곳이 좋다고 했다. 없으면 더 좋고. 남자들이 생각하면 식겁할 이야기이지만 오죽하면 ‘시월드’라는 말이 나올까 한다. 거기에 시누이는 덤이다.
우리 어머님은 마산어시장에서 전어를 파신다. 우스갯소리로 너는 전어 때문에 절대로 집 나갈 일은 없겠다고 했지만 왜 없을까. 고부관계에서 기권을 들어버린 남편과 시누이가 무슨 벼슬인 줄 아는 시누이까지. 그렇다고 시어머니가 무작정 싫은 것은 아니었다.
새아가를 시장으로 불렀다. 며늘애는 웃으면서 알겠다고 했지만 전화기 너머로 또 시장으로 부른다며 투덜거리는 음성이 귓가에 맴맴 돈다. 친구들이 왜 며느리 눈칫밥 먹으며 사냐고 당당히 살라고 하지만 요새 어디 그런가 싶다. 비린내 나는 손으로 손주 새끼들 얼굴도 못 만지게 하는 며느리 때문에 손주들을 미술관 전시품마냥 ‘좋아라’ 보기만 해야 할 때도 있다. 며느리와의 사이가 소원해진 건 시장을 맡아서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부터였다.
요즘 누가 시장에서 장사하는 걸 환영하겠느냐마는 그렇게 남처럼 퉁명스럽게 피할 줄은 몰랐다. 하기야 요새는 집 비밀번호 물어보면 왜 빈집에 들어가려고 하는지 그냥 자기네들 있을 때 오라고 하라고들 한다더라.
“어머니, 저 왔어요. 그동안 별 일 없으셨죠?”
그동안 이라는 단어에서 어색함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남의 집에 오는 사람처럼 꼭 무엇을 들고 온다.
“뭘 이런걸 사와. 그냥 오지.”
“그래도요.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시장. 그만 두기로 했다고. 그 말 하려고 불렀다. 비린내도 지겹고 힘에 부치기도 하고. 그리고 너한테 이어받으라는 그런 말도 안하마. 그냥 팔기로 했어.”
“어머니.”
“아무 말 마라. 그렇게 하기로 했어. 아범도 그렇게 알고 있을 거고. 삼 대째 이어왔으면 그걸로 됐지. 언제까지 이어하겠니.”
시어머니의 눈에는 살짝 눈물이 맺혔으나 그것은 원망도 미움도 아닌 굳은 결심으로 인한 후련함 때문이었다. 진작 이렇게 결정했다면 며느리와도 소원해지지 않았을 테고 마음도 한결 편안했을 것이다.
“어머니, 죄송해요. 그래도요 어머니, 시장 오기 싫다고 하면서도, 비린내 맡기도 싫다고 하면서도요 어머니, 우리 환이 가졌을 때요. 어머님이 구워주셨던 전어가 그렇게 생각나더라고요. 그런데 그 말 한마디를 못하고…. 그런데 어머님 어떻게 알고 전어 보내주셨잖아요. 그때 저 솔직히 눈물 나더라고요.”
“왜 안 섭섭했겠니. 나도 처음에 우리 시어머니가 시장 도맡아 하라고 할 땐 벼락이라도 맞은 듯했는데. 그래도 이 전어 때문에 집 안 나가고 여기에 뿌리내리고 있던 거 아니겠냐.”
오랜만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얼마 만인가 싶다. 시장의 비릿한 생선냄새 대신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적당히 기름기가 낀 전어의 고소한 냄새가 난다.
이게 얼마만이야? 가을빛을 닮았다기엔 너무 화려한 차림의 여자가 말했다. 십 년 만인가. 단풍은 여전하네. 곱다 고와.
내장산에 단풍을 보러 온 인파는 엄청났다. 색색들이 색동옷을 갈아입은 단풍과 노랑, 빨강, 분홍색의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제법 어울렸다. 내장산의 단풍은 철이 되면 으레 빨강, 노랑으로 물이 들었고 그렇게 매년 물이 드는 단풍을 사람들은 매번 놀라워하고 감동스러워했다.
“단풍 처음 봐? 뭘 그렇게 입을 헤 벌리고 봐?”
“옛날 생각이 나서 그런다, 왜! 알록달록 예쁜 게 꼭 내 20대 때를 보는 것 같아서”
“이 기지배 공주병 또 도졌나보다.”
그녀는 젊었을 때 한 미모 했다는 말을 자주했다. 실제로 그녀는 나이보다 젊어보였고 지금도 예전처럼 아름다웠다. 20대의 그녀는 단풍나무에서 떨어지는 낙엽이 바닥에 닿기 전에 손으로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단풍나무 아래에서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적도 있다. 그렇게 떨어지는 단풍나무를 하나 주워 어여쁜 글씨를 썼다. 그리고는 책속에 고이 넣어 보관을 했다.
빨갛던 단풍이 진한 갈색빛이 돌 때 쯤엔 코팅도 해서 보관하던 감성적인 그녀였다.
“조금만 천천히 걷자. 응?”
여자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여전히 친구들은 조잘거리며 그녀를 앞질러갔다. 거리가 점점 멀어지더니 어느 순간 친구들의 모습이 사라져갔다. 여자는 여전히 조금만 천천히 걷자고 말했지만 친구들이 그 말을 들었을 리 없다.
‘단풍이 아름답게 물들었잖아. 바람이 조금만 불어주면 좋겠는데.’
그녀는 단풍나무 아래에 서서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 옛날 책 속에 꽂고 다니던 단풍나무를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단풍은 여전했다. 늙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알록달록한 색채를 풍겼다.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고 단풍만큼 알록달록한 모습으로 산을 찾았다.
산을 오르기 위함인지 단풍을 보기 위함인지 몰랐지만 사람들은 즐거워보였다.
바람이 불었다.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떨어지는 낙엽이 있는지 둘러보았다.
바람이 한 차례 더 불었고 여자는 기다렸다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헬기가 높이 떠올라 있었고 사람들은 헬기를 향해 손을 흔들어댔다.
9시뉴스에서 단풍을 찍는 듯했다. 아니 단풍을 보러 온 사람들을 찍는 것일 수도 있다. 여자도 찍혔을까? 아니면 먼저 올라간 친구들의 모습이 담겼을 지도 모르겠다.
여자는 떨어지는 단풍을 코앞에서 잡아챘다. 구겨지지 않게 잘 보관할 수 있을까. 단풍에 그녀는 이렇게 적을 것이다. 사람들이 많은 오후, 단풍이 내게로 왔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단풍이다. 여전히 고운 빛을 띠고 있다. 내년이면 어떤 빛을 낼까.
바람이 불면 알록달록한 잎이 떨어진다. 잎이 떨어지면 갈색빛으로 늙을 것이다. 노랗고 빨갛던 단풍도 갈색으로 색을 잃으며 늙을 것이다. 그녀처럼.
“아빠, 이번 연말에는 어디 갈 거예요?”
딸의 머릿속에는 이미 가보고 싶은 곳이 가득한 것 같았지만, 이번에는 산통을 좀 깨야겠다. 나도 내년에는 꼭 내 시집을 내리라 결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번에는 멀리 가지 말자. 연말 되면 카운트다운 하는 곳 있잖아. 거기 가서 타종식 한 번 보고 오는 건 어때? 아빠가 옛날에 가 봤는데, 가수들도 많이 오고 불꽃놀이도 해.”
싫다고 떼를 쓰면 어떡하나 하고 있었는데, 자기도 그런 의미 있는 곳에 가는 게 좋다고 하는 것을 보니, 딸도 이제 어린애는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내도 꼭 한 번 직접 타종식을 보고 싶었다며 한 수 거들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의 연말 맞이 여행, 아니 연말 맞이 나들이 장소가 결정되었다.
서울 시내 어디가 북적거리지 않겠냐마는, 내가 젊은 시절부터 가장 좋아하는 북적임이 있다. 바로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일대. 시간이 비는 오후면 교보문고에 들러 소설책을 한 권 읽고 가기도 하고, 아직 초등학생인 조카들을 데리고 세종대왕 동상과 그 아래 숨겨진 박물관을 견학하기도 했다.
몇 년 전, 수많은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모였던 촛불집회가 열렸던 곳도 바로 이 세종대왕 동상 앞이다. 그리고 대학생 시절 사회 운동을 하러 나왔을 때, 회사원들이 건물 창밖으로 두루마리 휴지를 던지며 무언의 응원을 보내던 장관도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졌었다. 젊은 시절 아내와 함께 거닐었던 경복궁이 동상 너머에 있었었으며, 청계천이 처음 조성되었을 때에도 이곳에서 시작되는 물길을 보러 왔었다.
그렇다. 내게 있어 광화문은, 내가 아는 수십 년의 서울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었다.
세 시간 쯤 여유를 두고 광화문에 도착했다. 몰려드는 인파를 한 번에 감당할 수 없어 타종식이 있기 얼마 전에는 교통을 통제하기 때문에 종각에 미리 가 봐야 소용이 없으니, 그 전에 가족들과 함께 이 광화문 일대의 문화를 느껴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은 또 크리스마스였기에, 거리는 아직 오색 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상가들이 크리스마스와 연말 행사를 한 번에 챙길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 이어’였다.
나는 아내에게 근래에 크게 유행했던 로맨스 영화의 원작 소설 한 권을, 아내는 딸이 요새 푹 빠져 있는 외국 밴드의 앨범 한 장을, 딸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인의 새로 나온 시집 한 권을 선물했다.
“우리도 우리 나름대로 건실한 문화 향유층이야. 문화 시민이 달리 뭐 있겠어?”
딸이 건넨 말에 한바탕 웃으며 교보문고를 빠져나왔다. 청계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보러 왔는데, 청계천에도 언제나처럼 아름다운 조명들이 밝혀져 있었다.
“여기서 예전에 등 축제 정말 예뻤는데. 아빠가 매일 그렇게 광화문 노래를 불러도 안 와 닿더니, 그 때는 정말 세상에서 여기가 제일 아름다운 것 같았다니까요.”
그래, 문화라는 것이 말로 백 번 들어 무엇 하겠는가. 한 번 눈으로 보면 단숨에 반해버릴 것을. 내 철학을 늘어놓았다가는 면박을 면치 못할 것이기에, 마음속으로 할 말을 삼키며 웃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제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여기저기서 전화를 걸어 ‘새해 복 많이 받아!’하는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무척이나 정겨워 보였다. 오죽하면 이 일대에서만 휴대전화가 반쯤 불통이 되었겠는가. 사람들의 입가에는 하나같이 함박웃음이 걸려 있었다.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신나게 소리를 지르다 보니 행사는 모두 끝났지만, 하늘에는 여전히 삼천 원짜리 싸구려 불꽃이 팡팡 터진다. 화약재가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데, 아무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옷을 털어내지 않았다. 우리 가족도 노점상에서 파는 핫도그 하나씩을 들고, 축제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광화문을 걸었다. 평소에는 길거리 음식이라면 학을 떼는 아내도 오늘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지금 이곳이 바로 살아 숨 쉬는 서울 문화의 거리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싸우는 소리에 낮잠에서 깨었다.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다가 쨍그랑 하는 소리에 눈이 번뜩하고 뜨인 것이다. 할아버지께선 또 아버지가 만드신 도자기를 던지신 모양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싸우고 있는 방 문 앞에서 귀를 쫑긋하고 세우며 말들을 엿듣고 있는데 엄마가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고는 방으로 들어가라고 버럭 소리치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요 근래 종종 싸우셨다. 그 발단은 아버지의 뜬금없는 중대발표로부터였다. 오래 다니시던 회사를 그만 두시고 도자기를 만들고 싶으시다는 것이었다. 사실 할아버지께서는 오래도록 도자기를 만드시던 도예장인이시다. 그래서 아마 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도자기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자라 오래도록 그 꿈을 키워 오신 듯했다. 그렇지만 워낙 엄한 할아버지 앞에서 도자기를 만들고 싶다는 말을 쉬이 꺼내지 못한 채 지난 세월을 지나오신 듯했다.
“그만 두라고 하지 않았어? 도자기는 무슨 놈의 도자기야 네가. 다 때려 부수기 전에 그만 두어라.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네 어깨에 딸린 처자식은 어쩌고 너 혼자 여기 틀어박혀서 흙이나 만지작거리고 있겠냐는 거냔 말이다.”
할아버지께서는 아직도 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좀처럼 양 손을 어쩌지 못하고 숨만 씩씩 내뱉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종종 할아버지 작업실에 계신 적을 본 적은 있었는데 이렇게 밤낮없이 할아버지 작업실에만 계신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도자기를 만들어내면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망치로 깨부쉈다. 그래도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대들지 않고 부서진 조각들을 모아 마당 한켠에 쌓아두셨다.
그러던 어느 날 술을 잘 드시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어떻게 된 일인지 술이 잔뜩 취하셔서는 작업실로 들어가셨다. 그러더니 도자기들을 손수 다 깨부수며 서럽게 우셨다. 아버지께서 눈물을 보이시는 것을 처음 보았는데 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셨다. 어깨를 들썩이시며 아끼시던 도자기를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어머니와 할아버지께서 달려가셨는데 한동안 아무도 아버지를 말리지 않았다. 그저 한 발자국 떨어져 아버지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버지, 아버지. 듣고 계시죠, 아버지. 저요 아버지처럼 멋진 옹기장이가 되고 싶었다고요. 이렇게 흙 만지고 있는 것도 좋고 행복한데, 이젠 저도 제가 하고 싶은 것 해도 되지 않습니까? 예? 아버지, 대답 좀 해보세요. 예?”
취중진담이란 걸 눈앞에서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버지는 가슴 깊이 묵혔던 말들을 할아버지 앞에 고스란히 뱉어내고 있었다. 아버지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그렇게 커 보이시던 아버지가 한없이 작아지신 것 같아 마음이 저릿해왔다. 할아버지는 멀찌감치 에서 뒷짐을 지고 계시다가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아버지가 깬 도자기 파편들을 주우셨다. 그리고는 한동안 식어버린 가마 앞에 서계셨다.
다음 날 아버지는 머리를 지그시 누르시곤 식탁에 앉으셨는데 할아버지께서는 아침도 거르신 채 아침 일찍 외출을 하셨다고했다. 아버지는 간밤의 일이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와 대면하는 것이 자신이 없던 차였다가 도리어 잘 된 것 같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 아침 식사가 끝날 무렵 할아버지께서 돌아오셨는데 한 손에는 구하기 어렵다는 백토와 도예도구들을 사들고 오셨다. 그리고는 무심한 듯 마루에 내려놓으시고 아버지께 나갈 채비를 하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점퍼를 챙겨들고 나갈 준비를 마치셨다.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지도 않으셨다. 그저 할아버지 발길을 뒤따라 갈 뿐이었다. 한참을 걷고 또 걷다보니 곤지암 도자기공원에 다다랐다. 할아버지께서는 간밤에 있었던 일도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등의 말씀도 없으셨다. 그저 도자기 공원에 놓인 여러 도자기들과 도예 작품들을 세심한 눈으로 바라보시기만 하셨다.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뒤에서 할아버지의 시선을 따라 감상하였다. 그리고 어느덧 오래던 가마 앞에 다다르셨다. 전통가마라고 쓰인 그곳에서는 언제 불을 떼었는지도 모를 오래된 가마 하나가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할아버지께서 입술을 떼셨다.
“그게 그리 하고 싶더냐. 그리 하고 싶어. 하고 싶으면 해야지 어찌 하겠어.”
“아버지.”
“온 신경을 이 투박한 손끝에 실어야 한다. 아름다움을 빚는 다고 생각해야지.”
집으로 돌아오신 후 할아버지는 식었던 가마에 다시금 불을 지피셨다. 그리고 오래도록 그 앞에 서계셨다. 아버지가 작업실에서 나오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