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졸업반 시절 떠난 봉사활동에서였다. 나는 보육원에서 어린 아이들을 돌보며 꽃밭에서 아이들에게 꽃반지를 만들어 주는데 멀리서 날아온 공이 내 앞에 떨어졌다. “Sorry.” 라고 짧은 말을 남긴 채 공을 가지고 휙 달아났다. 벤치에 앉아 공을 들고 간 쪽을 바라보니 남자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며 놀아주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보육원 아이들은 일제히 식판을 들고 배식을 기다렸다. 아이들에게 점심을 먹이고 아이들 낮잠시간이 되니 한숨 돌릴 시간이 났다.
아이들의 장난감을 치우고 빨랫줄에 빨래를 거는데 큰 이불 같은 건 영 쉽지 않았다. 그런데 웬 키 큰 남자가 불쑥 내 앞에 서서 빨래를 걸어주었다. 자세히 보니 아까 축구공을 가지고 간 그 외국인이다.
“때, 땡큐.”
“뭘요.”
“어! 한국말 할 줄 알아요?”
“그럼요. 한국말 조금 할 줄 알아요. 나는 메브에요. 프랑스에서 왔어요. 당신은요?”
“아. 저는 은영이에요.”
빨래를 다 널고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이곳에 봉사활동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한국은 관심 많아요. 우리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에요. 그리고 여기는. 음. 봉사 좋으니까.”
“그렇군요.”
서툴게 한국말을 하는 메브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약간은 귀엽다고 할까.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프랑스 우리 동네에 서울공원 있어요. 나는 가보았습니다. 서울에도 파리공원 있어요.”
“프랑스에 서울공원이요?”
강남역 사거리에 서울시와 이란의 수도 테헤란시가 자매결연을 맺은 기념으로 길 이름을 붙인 것은 알았지만 프랑스와도 이렇게 공원을 지어 외교적인 문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프랑스 서울공원 멋져요.”
메브는 휴대전화에서 서울공원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한국적인 고전미가 넘치는 정자에 불로문까지. 사진 속 메브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멋지네요. 파리공원에도 가 보았나요?”
“아직 못 가봤어요. 내일 가볼거에요. 같이 갈래요?”
그렇게 갑작스런 인연은 하루 더 함께 하게 되었다.
검정색 모자에 빨간색 운동화를 신은 메브는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메브와 파리공원을 둘러보니 정말 파리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파리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은 작은 모형의 에펠탑과 개선문 정도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나 에펠탑 정말 보고 싶었는데, 언젠가 파리에 가면 꼭 보고 말거야.”
“이거보다 조금, 조금 더 크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농담 아니야 메브. 난 파리에 꼭 가보고 싶어. 에펠탑도 보고 여기 있는 개선문도 보고.”
“언제 놀러와. 우리나라에 은영 초대할게.”
“그래, 고마워.”
“나는 말이야 메브. 꼭 프러포즈는 에펠탑 아래에서 받고 싶어. 그게 내 로망이랄까?”
웬일인지 메브 앞에서 뜻밖의 이야기까지 꺼내는 내가 놀라웠다. 그저 프랑스라는 나라와 파리라는 도시에 연계가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정도로 메브와 가까워 졌다고 느껴졌을까.
“꼭 와. 내가 불 반짝 하고 있을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프랑스 사람과 그 프랑스 앞에 서 있는 한국 사람이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한발자국 더.
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급히 검은색 자동차에 올라탔다. 고급스런 자동차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는 머리카락이 늘어져 더 초라해보였다. 여자가 차에 올라 탈 때 차 문을 열어준 남자에게 무언가 이야기 할 때 남자가 짧게 ‘하이’라고 하는 것 보니 일본인 같았다.
달빛이 힘을 잃어 어스름했다. 낡았지만 붉은 빛이 선명한 벽돌 건물 앞에 여자는 멈추어 섰다. 여자는 차 안에서 머리를 빗었는지 아까보단 단정해보였다.
차마 붉은 벽돌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문 밖만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여자는 다시 자동차에 올랐다.
다음날 오전은 유난히 볕이 따가웠다. 선글라스나 모자 없이는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힘들도록 쾌청한 하늘은 뜨거운 여름을 실감나게 했다. 어제 본 검은색 자동차가 다시금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오늘은 여자 혼자가 아니라 웬 꼬마아이와 함께였다. 아마 여자의 아들이라 생각했다. 여자는 어제보다 단정한 차림이었다. 검정색 투피스를 차려입은 여자는 아이의 손을 잡고 붉은 벽돌 건물로 들어섰다.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타케이. 잘 봐. 오늘을 잘 기억해둬.”
여자는 한국말을 곧잘 했다. 아이는 짧게 응, 하고 대답하더니 경건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여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간 곳은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지사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붙어있는 방이었다. 여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아이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가벼운 목례를 했다. 방을 나오고 나서는 인형으로 고문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은 곳을 들어갔다. 실제와 가까운 비명소리와 인형의 모습에 타케이는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 무서웠는지 여자의 뒤로 숨으며 나가고 싶어 했다.
“타케이. 무섭니? 하지만 기억해야해. 잊어버리면 안 돼.”
무서워하는 타케이의 손을 잡고 건물 건물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날이 쾌청해서 그런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소란스럽지 않았다. 그 중에서는 이들과 같은 외국인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뼈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에 엄숙함을 표했다.
타케이는 여전히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한 곳을 응시하더니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유관순 열사의 사진이 붙어있는 곳이었다.
“타케이. 유관순 열사 알지? 이분이 여기에서 돌아가셨어.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이야.”
타케이는 그러고도 한참을 멍하니 사진만 바라보았다.
아마 감옥이라는 곳은 죄가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인데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왜 감옥에 갇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다시 한 번 가볍게 고개를 숙인 채 아이와 함께 검은 차에 올라탔다. 조용한 발걸음이라 다녀간 흔적도 없이 고요하게 사라졌다.
차안에서 여자를 모시고 가는 남자가 물었다.
“이곳을 이렇게 자주 찾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타케이까지 데리고.”
“당연히 와보아야 하는 곳이니까요. 당연히 알아야 하고.”
“그래도…….”
“유타, 여기에 계신 분들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그리고 빼앗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그들의 뼈아픈 외마디 비명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어요. 잇몸이 문드러져 이가 으스러져도 소리 한번 힘껏 지르지도 못한 분들이라고요.
지나간 시간이고 흘러버린 역사라고 해서 모른 척 눈을 돌리는 건 비겁해요. 좁고 어두운 무서운 곳에서 두꺼운 철제 창이 열리기만을 바라던 사람들의 핏물 섞인 소리를 들어야 해요.”
여자는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낡은 지갑 속 흑백사진을 말없이 꺼내볼 뿐이었다.
자영업을 하기 때문에 평소 쉽게 가게 문을 닫을 수 없었던 남자. 그래서 주기적으로 떠나는 휴가도 한번 제대로 떠나본 일이 없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3년이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사업이었기 때문에 남자는 지난 3년간 아내와 아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이게 다 처자식을 위해 뼈 빠지게 버는 돈이라고 생각해왔으니까 미안하긴 했어도 조금은 당당했다. 그런 남편을 아내도 적잖이 이해해주는 눈치였다.
생전 가게로 전화를 안 하는 아내인데 웬일인지 가게로 다 전화를 했다. 아내의 말이 빨랐고 약간은 울먹였다.
“전화가 왔었어요. 방금. 민준이 담임선생님한테.”
“담임선생님한테? 왜? 민준이 뭐 사고친거야?”
“아, 아니. 학교에서 청소년 우울증 상담검사 같은 걸 받았는데. 결과가….”
평소 전화는커녕 부모님 모시고 오라는 소리 한번 듣지 않았던 터라 심장이 덜컹했다. 차라리 친구와 싸우거나 숙제를 안 해왔다는 전화였으면 좋았을 걸. 담임선생님의 전화는 뜻밖에도 아이가 학교에서 받은 청소년 우울증에서 우울증 수치가 높게 나왔다는 것이다. 병원에서 좀 더 자세한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전화였다.
우울증. 학교 다니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들었나? 아니면 학교에서 친구들과 관계가 좋지 않나? 그런 것도 아니다. 아내의 말대로라면 담임선생님께선 아이들과의 문제는 없어 보인다고 했으니까.
누구를 위한 3년의 시간이었나 생각한다. 남자는 가장으로서 나름대로 열심히 하였는데 아이는 아빠의 빈자리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었나보다.
모처럼 가게 문을 닫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월성계곡으로 떠났다. 병원을 가보기 전 일단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담임선생님의 소견이었다. 아이는 즐거워보였다.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니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면 아이에게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감정 상태는 어떤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방송을 타서인지 계곡에는 때 늦은 피서객이 몰려들었다. 아빠와 즐겁게 물놀이를 하는 아이도 보였고 튜브를 타고 물살을 즐기는 아이들도 보였다. 멀리서 고기 굽는 냄새와 옥수수를 먹는 아이들이 보이며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내 아이의 머릿속도 아니 마음속도 한가롭다고 느껴지면 좋을 텐데 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물은 시리도록 맑았고 푸른빛이 맴도는 풍경은 봄의 화사함만큼이나 밝았다. 저마다 하하 호호 웃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방갈로 마다 퍼져나갔다.
하루를 아이와 꼬박 즐겁게 놀아본 것이 얼마만인지 남자의 머릿속은 금세 까마득해졌다. 내심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해맑게 방갈로를 뛰어다녔고 여느 때와 같이 즐거워보였다. 은근슬쩍 학교에서의 생활을 물어보기 좋은 시간이었다.
“학교 다니는 것이 힘들어? 친구들과 사이는 어때? 공부하는 것이 지치니?”
“아빠, 그렇게 한꺼번에 많이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빨리 대답해봐. 응?”
“음. 아빠! 우리 다음에는 또 어디가요?”
소복소복 눈이 내리던 날. 인애는 코끝이 빨개지도록 민준을 기다렸다. 수업이 끝날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민준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자 인애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장갑을 낀 손은 따뜻해질 줄 몰랐고 몸도 점점 으슬으슬 떨렸다. 민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
인애와 민준은 같은 학교 선후배로 만났다. 인애는 긴 생머리에 항상 음악교재를 들고 다니며 뭇남성들의 마음을 뒤흔들어놓곤 했다. 민준도 그 중 하나였다. 인애는 학교생활도 열심히 했다. 피아노 연습이 없는 날이면 동아리 활동으로 학교 방송실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학생들은 신청곡이나 사연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인애에 대한 연애편지를 보내기 일쑤였다. 그런 인애가 민준을 만난 곳은 뜻밖의 장소였다.
법학과 학생이었던 민준은 인사관 건물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음료수 캔 하나를 뽑아 마시려 오백 원짜리 동전을 자판기 동전투입구로 밀어 넣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동전을 집어삼킨 자판기가 고장이었는지 꿈쩍도 안하는 것이었다. 민준은 자판기를 손으로 쿵쿵 쳐보다가 그래도 아무런 낌새가 없자 발로 쾅쾅 걷어차 보았다. 그때였다.
“저기, 지금 거기서 뭐하는 거예요? 자판기를 그렇게 걷어찬다고 음료수가 나오겠어요? 돈이 없으면 마시지를 말던가.”
민준의 행동을 본 인애의 가시 박힌 말이었다. 민준은 순간 당황하였고 부끄러운 마음에 손에 들고 있던 법학개론 책을 슬쩍 뒤로 숨겼다.
“저기요, 그게 아니라 돈을 넣었는데 이 자판기가 먹어서 잠깐 쳐본 거거든요? 알지도 못하면서 왜 남의 일에 오지랖 넓게 참견이에요?”
“뭐라고요? 오지랖이요? 자판기가 돈을 먹었으면 연락을 하면 될 것을 그것도 법을 공부한다는 학생이 그래도 된다는 말씀이세요?”
인애가 민준의 책을 본 모양이었다. 민준은 얼굴이 홍당무보다 더욱 벌개져서 마른기침을 한 번 내뱉더니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살면서 특별히 죄를 짓는다거나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낯 뜨겁고 황당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인애 앞에서라니. 민준은 책으로 머리를 세게 내려쳤다.
민준은 오해를 풀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인애에 대한 정면승부인지 방송실에 사연을 보내기로 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전 자판기에 대한 화풀이도 아니었고 그저 동전을 집어삼킨 자판기에 대한 작은 하소연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해서요. 신청곡은 없고 이 사연 들으면 정문 앞으로 4시까지 나와 줄래요?’
일을 저지르긴 했으나 정말로 인애가 나와 줄지 걱정이었다. 드디어 4시. 정문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인애가 나왔다. 둘은 그렇게 만났다.
*
조금 더 있다가는 추위에 인애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뒤를 돌아서 가려는데 민준의 친구가 인애를 불러 세웠다. 지금까지 민준을 기다린 거냐며 민준이 오늘 열병이 나 학교에 못나왔다는 것이었다. 그저 서프라이즈로 일부러 전화기도 꺼놓고 기다린 것이었는데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전화를 많이 했을까 하고 전화기 전원을 켜보니 수십 통의 전화와 문자가 남겨져 있었다. 인애는 곧바로 민준에게로 달려갔다.
민준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워보였다. 그 와중에도 코끝이 빨개진 인애에게 얼마나 기다린 거냐며 감기걸린것 아니냐고 물었다. 인애는 바보같이 아픈 사람이 누굴 걱정 하냐며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부엌으로 향했다. 달그닥 달그닥 소리가 들리더니 한참 뒤 죽을 끓여왔다.
“그냥 편의점 죽 하나 사다주지 뭐 하러 이렇게 만들어. 그런데 이건 무슨 죽이야?”
“게살죽! 대게 살 발라서 이렇게 죽에 비벼먹으면 힘이 불끈불끈 솟는다니까.”
“게살죽? 맛있겠다. 네가 살 다 바른 거야?”
“그럼! 나 아팠을 때 우리엄마가 항상 영덕대게 푹 삶아서 다릿살이랑 내장이장 참기름 한 방울 넣어서 쓱쓱 비벼줬거든. 그러면 한 그릇 뚝딱이었어. 그러니까 한 번 먹어봐.”
“맛있다. 정말, 힘이 불끈 솟는데? 고마워.”
다음날 방송실로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인애는 시계를 한 번 들여다보더니 자판기에서 음료를 하나 뽑아들고 정문으로 향했다. 누군가에게 달려가는 사람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요즘은 힐링이라는 단어로 억지스러운 여유를 만들고 자신의 행복함을 시간에 끼어 맞추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다 만들어진 여유이고 행복인데 말이다. 그렇게라도 삶의 즐거움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나쁘지 않은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숨이 약간 가빠지려고 하자 수려한 자태의 산사가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과연 이곳에서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지 고민이 들었다.
그때 늙은 스님이 합장을 하며 걸어오셨다.
“사람이 많아 당황하셨나봅니다.”
“네, 스님. 이곳이 꽤 유명한 절인가봅니다. 사람이 많은 걸 보니.”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쉼을 얻어 가면 좋지요. 혹 템플스테이를 하러 오신 거라면 저를 따라오세요.”
서른이 넘은 나이에 중, 고등학생들과 템플스테이를 하게 될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이곳을 찾은 듯 했다. 위엄 있는 자태의 대웅전을 지나 작고 아담한 방 하나를 배정받았다. 그곳에 짐을 풀고 일박 이일동안 지낼 옷을 건네받았다. 옷을 갈아입고 마루에 걸터앉아 숨을 크게 들이마셔보았다. ‘공기는 좋네.’라고 생각하던 차에 비로전 앞에 한 여인이 서성이는 모습이 눈에 들었다. 나이도 꽤나 비슷해 보이는데 무엇 때문에 계속 한 곳에 머무르는 것일까 생각했다. 가까이 가볼까 생각하다가 괜히 방해하는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을 접었다.
가볍게 저녁 발우공양을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이 생겼다. 산책 겸 낮에 미처 돌아보지 못한 곳을 다녀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살펴보는데 낮에 비로전에서 보았던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조용한 걸음으로 비로전 앞을 서성였다. 날이 어스름해져서 일까 그녀에게 궁금증이 생겼고 말을 걸어보고싶은 충동이 생겼다.
“저기. 낮부터 쭉 여기에 서계시던데.”
여자는 낯선 사람이 낮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여겨서일까 꽤나 경계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네, 템플스테이 하러 왔어요.”
“아, 그러시구나. 저도 템플스테이 하러왔는데. 오늘 오신 거예요?”
여자도 템플스테이를 하러 왔다고 했다. 나이도 비슷하고 이곳에 온 목적도 비슷하다고 여긴 나는 여자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조금 더 생긋 웃어보였다.
“네, 오늘요.”
여자의 대답은 그래도 단답이었다. 여자의 눈빛에서 무언가 쓸쓸함이 묻어보였다. 말하기 힘든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긴 나는 여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저랑 나이도 엇비슷해 보이시는데, 저는 서른둘이에요. 아직 미혼이고요. 사실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힐링좀 해볼까 하고 들어왔는데 공기도 좋고 뭐, 종교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편안해 지는 것 같아요.”
여자는 무심한척했지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이 여자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지 않을까 생각했다.
말없이 내 말만 듣던 그녀가 조용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랑 나이가 같네요. 저도 서른둘이에요. 전 결혼을 했는데, 결혼 한지 꼬박 2년이 지났는데 아이가 안 생겨서요. 여기 비로전에서 발가벗은 동자를 발견하면 사내아이를 가질 수 있다지 뭐예요. 그래서 오늘 낮부터 계속 여기만 서성이게 되네요.”
뜻밖이었다. 여자도 템플스테이에 온 것이라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그저 잠시 쉼을 얻고자 이곳을 찾은 줄 알았다. 그런데 여자는 꽤나 속 깊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군요. 그래서 벌거벗은 동자는 찾았어요?”
“아니요, 잘 안보이네요. 아이와 연이 닿지 않나봐요.”
“그럼 눈을 감고 찾아보세요. 눈을 감고 눈앞에 동자승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이를 가득 품어보세요, 그럼 누가 알아요? 떡하니 아이가 들어설지.
미안해요. 달리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네요. 그래도 전 여기 다 비우러 들어온 것 같은데 어느새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을 해보니까 마음속에 뭔가 가득 들어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걸 말해주고 싶었어요.”
여자는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주려고 조용한 걸음으로 그녀의 곁을 떠나왔다.
비움과 채움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 정반대인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주말의 밤은 언제나 시끌시끌하다. 극장 앞은 아직도 오늘 공연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극장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긴장과 환호성, 불빛이 가득한 아름다운 극장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만,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고 난 뒤의 조용한 극장의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입장권을 비롯한 자질구레한 쓰레기들이 나뒹구는 가운데서, 나는 재빨리 다음 공연을 위해 연필을 놀렸다.
“윤 작가님, 벌써 또 시작하셨어. 하여튼 못 말린다니까.”
무대 철거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스탭들 가운데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도 그 쪽을 보고 씩 웃어 주었다.
내가 이곳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 지도 어느 새 삼 년.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여 순수 예술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던 내 기가 꺾인 지도 삼 년이 지났다.
삼 년 전, 나는 내 자신 이외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예술을 하던 꽉 막힌 예술인들 중 한 명이었다. 나는 내 손끝에서 탄생한 시나리오가 시처럼 아름답고 고상한 언어들로 가득 차 있길 바랐다. 정작 요즘엔 시인들도 그런 아집에 갇힌 언어들을 사용하기를 거부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여하튼, 나는 내가 배워 온 모든 것들이 아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깨 너머로 배운 철학이나 심리학 따위로 내 시나리오의 절반 이상을 채워야 직성이 풀렸고, 어쩌다 한 번씩 내 시나리오로 공연을 올리게 되면 무지한 관중들에 대한 분노로 밤새 술을 마셔야 했다.
“연극에 대해, 시나리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내 공연을 보러 오니 당연히 반응이 시원찮을 수밖에 없지!”
연극계에서 꽤나 입지를 굳힌 선배들이 조언이랍시고 내 놓는 대중성에 대한 문제는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네가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법을 조금만 배운다면 이렇게 힘들어하지 않을 텐데.”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선배들도 똑같다며 테이블을 뒤엎기 십상이었다.
그러던 나를 바꾼 것이 바로 이 극장에서 우연히 보게 된 마임 공연이었다. 선배들이 하나같이 말하던 관객과의 호흡. 그 날도 모니터의 하얗게 빈 화면 위에서 홀로 깜빡이는 커서만을 바라보다가, 내게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그 호흡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찾은 극장이 바로 이 곳. 작은 극장 돌체였다.
처음 보는 마임 공연은 내게 있어 충격 그 자체였다. 무대 위의 피에로와 어릿광대들이 펼치는 공연은 내가 그렇게 집착해 왔던 언어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무시한 공연이었던 것이다. 한껏 무게를 잡은 채 절규하거나 눈물을 흘리는 비극의 주인공들 대신에 외발자전거를 타거나 저글링을 하고, 마술을 선보이는 광대들로 채워진 무대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공연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 침묵을 지켜야 할 관객들은 여기저기서 손뼉을 치며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뭐 이런 공연이 다 있나 싶어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풍선을 불던 어릿광대 하나가 다가와 내게 풍선으로 만든 꽃을 하나 건네주었다. 아이들이 부러움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어찌할 줄을 모르고 서 있던 나를 내버려둔 채 어릿광대는 무대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 그게 이 극장과 나의 첫 번째 이야기다.
“아니, 어떻게 그런 곳이 다 있어?”
분노가 섞여 있는 내 물음에 선배가 웃음을 터뜨렸다.
“거긴 원래 장애인이나 다문화 가정이나, 아니면 청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연극도 많이 올라 와. 인천 클라운 마임 축제도 거기서 열리고.”
“대체 비전문가들을 왜 무대에 올려? 전문 연극인들만으로도 어려운데.”
내 물음에 선배는 네가 처음에 왜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는지를 떠올려 보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나는 기이한 풍경을 보게 되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대여섯 명의 고정 멤버가 한 달에 한두 번씩 모이는 그 술자리에서, 나를 뺀 모두가 아주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직 나만이 세상의 모든 걱정 근심을 다 지고 있는 양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쓴 시나리오 한 편을 들고 이 극장을 다시 찾았다. 그 동안 써 온 수십 개의 시나리오를 모두 버렸기에, 나는 이것을 내 첫 번째 시나리오라고 소개했었다.
내 첫 시나리오로 공연이 올라가던 날, 나는 이 극장을 처음 찾았던 날처럼 관객 틈에 앉아 있었다. 이미 정해져 있는 무대 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동안, 무대와 관객들이 함께 만드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태어나고 있었다.
탁. 식탁에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무심하고 매정하다. ‘크음’ 하고 남편이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기침에는 증발하다 남은 알코올의 잔해가 남아있었고 이내 공기 중에 산산이 부서졌다.
후루룩후루룩 소리만 공중에 맴돌았다.
오늘도 아침엔 청양고추 팍팍 들어간 콩나물국이다. 남편에게 술 좀 그만 마시고 몸 생각 좀 하라고 그렇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해도 마이동풍이다. 이런 잔소리가 오고 가고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반복될 때면 어느 집이나 어느 가정이나 다 비슷한가 보다 생각이 든다. 예전에 우리 엄마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킁킁, 이건 아빠의 냄새다. 아빠가 또 약주를 한 잔 하신 모양이다. 엄마가 한결같이 잔소리를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을 보면 아빠는 참 올곧은 사람이다. 엄마는 아빠에게 잔소리를 빙자하여 모진 소리도 하지만 그건 다 아빠를 위한 거란다.
술이 좋으면 술이랑 함께 살라고 하던가, 술독에 빠진 사람도 당신만은 못할 거야라는 등의 말을 들어도 아빠는 그저 사람 좋은 웃음이다.
아빠는 내게 호랑이같이 무서운 사람이다. 요즘은 딸 바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딸이라면 그저 풀려버린 자물쇠처럼 무장해제인데 우리 아빠는 철저했다. 사랑한다는 말조차 언제 들었나 가물가물하다. 심지어 다른 애들은 늦은 시간이 되도록 딸이 귀가하지 않으면 끊임없이 전화를 한다는데, 우리 아빠가 내게 전화를 할 때에는 아빠 출근 시간에 차키를 두고 왔을 때 가지고 내려오라는 것이 유일했다.
그런 아빠가 무장해제가 되고 딸 바보가 되는 날. 바로 술을 한잔 하시고 들어오실 때이다.
“연주 자니? 아빠 왔어. 아빠가 왔는데 왜 나와 보지도 않아? 이리 와봐.”
“아휴, 술 냄새. 아빠 또 술이야?”
“아이고, 우리 연주 아직 애기네 애기야. 아빠 수염 까끌까끌 하지?”
“아, 따가워. 그리고 이것 좀 놔. 숨 막힌단 말이야.”
사실은 숨이 막혔던 것이 아니라 아빠의 품이 썩 어색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아빠는 지금 이런 모습을 다음날 아침 기억하실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상 아빠가 술을 드시고 온 다음날이면 북어와 콩나물을 넣은 해장국을 끓여주신다. 특히 청양고추를 송송 썰고 고춧가루까지 팍팍 쳐 아주 매콤하고 칼칼하게 말이다. 내가 맵다고 고추를 쏙쏙 건져놓으면 아빠는 아빠그릇에 넣으라고 손짓을 한다.
엄마는 밥을 먹는 내내 아무 말도 없다. 아빠도 마른기침만 뱉을 뿐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아빠가 술을 드시고 오시는 날마다 벌어지는 풍경이다. 숟가락으로 밥 한 숟갈 뜨고 엄마 눈치 한번. 국 한 숟갈 뜨고 아빠 눈치 한 번씩 번갈아가며 밥을 먹으면 엄마가 무거운 침묵을 깨고 괜히 나에게 호통을 치신다. 밥 먹는데 집중하라고. 치, 밥 먹는데 무슨 집중이람.
내가 더 어렸을 때는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하는 줄 알았다. 왜냐하면 우리 반 지영이네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지영이네 아빠가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지영이네 엄마는 우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빠가 술을 마시고 온 날이면 안방 문을 배꼼 들여다보며 엄마가 우시는지 확인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는 아빠를 미워한 것이 아니었다. 매콤하고 칼칼한 청양고추를 듬뿍 넣어 아침상을 차려드린 걸 보면 안다.
내가 지금 그러하고 있는 것과 같이.
12월 31일. 오늘은 날씨가 제법 쌀쌀한걸 보니 비가 내린다면 눈으로 바뀔 것 같았다.
날씨가 흐리면 안 될 텐데 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차에 남자친구가 오후에 날 갠다는 희소식을 전했다.
사람들 마음속에도 연말이라는 뜬 구름이 가득 차있는 듯했다, 거리마다 사람들은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있었고 오늘이 세상 끝 마지막 날이라도 된 것처럼 무엇인가를 하려고 노력했다. 특별히 어디를 가지 않는다고 해도 제야의 종소리는 들어야 한다며 종로 2가로 모여들 것이다. 사실 특별할 것 없이 지나가는 하루일뿐임에도 사람들은 굳이 무엇인가를 하며 추억의 액자를 못박으려했다. 언젠가는 잊힐 무심한 다짐들과 함께.
여자도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번 남자친구와 처음 맞는 새해였기 때문에 여자는 더욱 들떠있었다. 여자는 아침부터 12월 31일의 코스를 짜기 시작했다. 오전에 만나서 간단히 브런치를 즐긴 뒤 점심은 좀 더 특별하게 도시락이 어떨까? 저녁은 정말 근사한 곳에서 칼질을 한 뒤 12시에 맞추어 종로로 가는 일정이었다. 친구들과의 여행에서도 이렇게 짜임새 있는 일정을 짜본적이 없던 그녀였다. 남자친구도 그녀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노력했다. 카페에 앉아 점점 맑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남자는 여자에게 선뜻 제안을 하나 했다.
“오늘 우리 해돋이 보러갈까? 너랑 해 뜨는 거 보고 싶은데.”
“해? 음, 나 외박 안 되잖아. 너도 알면서. 우리 엄마 아빠 난리 나실걸.”
“그럼 새벽에라도 출발하면 되잖아. 응? 해돋이 보러가자.”
남자는 좀처럼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여자도 해돋이를 보러 가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새해라고 해서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사람들과 술 냄새인지 땀 냄새인지 뒤섞여 콧물은 주르륵 흐르고 몸을 오들오들 떨며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소리소리 지르는 아저씨들 틈 사이에서 새해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여자는 코를 한번 훌쩍이며 ‘이따 상황 봐서’라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남긴 뒤 화제를 돌렸다.
여자의 짜임새 있던 일정대로 둘은 간단히 브런치를 즐긴 뒤 여자가 정성스럽게 싼 도시락까지 먹었다. 이제 남은 건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종소리를 들으러 갈 것인지 해돋이를 보러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시간이 지나면 귀찮아 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애국가를 통해서 나오는 일출도 볼만하다고 여길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쉽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남자는 평소에 고집을 부리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여자는 오늘 특별히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무슨 다짐을 얼마나 거창하게 하려고 해돋이까지 보러갈까 싶었다.
“좋아, 가자. 해보러. 말갛게 떠오르는 해, 보자구.”
“가기로 한 거야? 고마워. 담요랑 손난로도 준비했지.”
남자는 활짝 웃었다. 가지말자고 떼를 썼다면 남자가 많이 실망했겠다 생각했다. 담요랑 손난로까지 준비한 것을 보니 더욱 그러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연신 하품을 하는 여자를 향해 남자는 눈 좀 붙이라고 했지만 여자는 무거운 눈꺼풀을 끔벅이며 시계를 들여다봤다.
오전 4시 43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남자는 곧 도착이라고 말했고 여자는 으응 이라고 대답했다.
예상대로 사람들은 많았다. 가족, 연인들로 저마다 들뜬 표정을 지었다. 해가 떠오를 때 무슨 다짐을 할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넌 해 뜰 때 무슨 다짐할거야? 담배는 안 피우니 금연은 아닐 테고, 다이어트? 아님 승진?”
“그런 거 말고 있어. 비밀이야. 안 알려준다고.”
“치, 우리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어. 빨리 이야기 해줘 응?”
여자가 남자에게 딱 붙어서 이야기를 할 때 저 너머에서 붉은 해가 비쳤다. 사람들은 웅성웅성하며 한 곳을 응시했다.
검고도 붉은 해를 보니 괜스레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멋지다.”
쉿.
여자가 말을 하려는데 남자는 여자의 말을 막았다. 해는 이미 떠오르고 어스름히 새벽이 밝아왔다. 여자는 참았던 졸음이 몰려왔고 남자는 끝내 어떤 다짐 그리고 소원을 빌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여자의 손을 잡아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