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루한 옷차림의 여자는 급히 검은색 자동차에 올라탔다. 고급스런 자동차와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는 머리카락이 늘어져 더 초라해보였다. 여자가 차에 올라 탈 때 차 문을 열어준 남자에게 무언가 이야기 할 때 남자가 짧게 ‘하이’라고 하는 것 보니 일본인 같았다.
달빛이 힘을 잃어 어스름했다. 낡았지만 붉은 빛이 선명한 벽돌 건물 앞에 여자는 멈추어 섰다. 여자는 차 안에서 머리를 빗었는지 아까보단 단정해보였다.
차마 붉은 벽돌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문 밖만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여자는 다시 자동차에 올랐다.
다음날 오전은 유난히 볕이 따가웠다. 선글라스나 모자 없이는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힘들도록 쾌청한 하늘은 뜨거운 여름을 실감나게 했다. 어제 본 검은색 자동차가 다시금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오늘은 여자 혼자가 아니라 웬 꼬마아이와 함께였다. 아마 여자의 아들이라 생각했다. 여자는 어제보다 단정한 차림이었다. 검정색 투피스를 차려입은 여자는 아이의 손을 잡고 붉은 벽돌 건물로 들어섰다.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타케이. 잘 봐. 오늘을 잘 기억해둬.”
여자는 한국말을 곧잘 했다. 아이는 짧게 응, 하고 대답하더니 경건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여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간 곳은 독립을 위해 싸운 애국지사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붙어있는 방이었다. 여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는 아이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가벼운 목례를 했다. 방을 나오고 나서는 인형으로 고문하는 장면을 재현해 놓은 곳을 들어갔다. 실제와 가까운 비명소리와 인형의 모습에 타케이는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 무서웠는지 여자의 뒤로 숨으며 나가고 싶어 했다.
“타케이. 무섭니? 하지만 기억해야해. 잊어버리면 안 돼.”
무서워하는 타케이의 손을 잡고 건물 건물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날이 쾌청해서 그런지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소란스럽지 않았다. 그 중에서는 이들과 같은 외국인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뼈아픈 역사의 한 페이지에 엄숙함을 표했다.
타케이는 여전히 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한 곳을 응시하더니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유관순 열사의 사진이 붙어있는 곳이었다.
“타케이. 유관순 열사 알지? 이분이 여기에서 돌아가셨어.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이야.”
타케이는 그러고도 한참을 멍하니 사진만 바라보았다.
아마 감옥이라는 곳은 죄가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곳인데 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 왜 감옥에 갇혔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다시 한 번 가볍게 고개를 숙인 채 아이와 함께 검은 차에 올라탔다. 조용한 발걸음이라 다녀간 흔적도 없이 고요하게 사라졌다.
차안에서 여자를 모시고 가는 남자가 물었다.
“이곳을 이렇게 자주 찾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타케이까지 데리고.”
“당연히 와보아야 하는 곳이니까요. 당연히 알아야 하고.”
“그래도…….”
“유타, 여기에 계신 분들은 자유와 평화를 위해 그리고 빼앗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그들의 뼈아픈 외마디 비명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어요. 잇몸이 문드러져 이가 으스러져도 소리 한번 힘껏 지르지도 못한 분들이라고요.
지나간 시간이고 흘러버린 역사라고 해서 모른 척 눈을 돌리는 건 비겁해요. 좁고 어두운 무서운 곳에서 두꺼운 철제 창이 열리기만을 바라던 사람들의 핏물 섞인 소리를 들어야 해요.”
여자는 자신이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낡은 지갑 속 흑백사진을 말없이 꺼내볼 뿐이었다.
오늘 아침은 유난히 몸이 무거웠다. 간밤에 누군가에게 솜방망이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삭신이 쑤셨다. 의도하지 않은 무거운 신음이 입 밖으로 슬며시 흘러나왔다. 겨우 팔과 다리를 뻗어 자다 깬 그대로 기지개를 켰다.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데 현기증이 났다. 한번 휘청거리며 선반 모서리를 손으로 짚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걷는데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빛 때문에 다시금 현기증이 났다.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앉았는데 몇 개의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공지사항. 어제 연락드린 외국인을 위한 맞춤 프로그램에 대한 문서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확인 바랍니다.
클라이언트는 도무지 주말과 휴일의 개념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회사에 나오라는 말만 안 했을 뿐이지 자신이 보낸 메일을 확인하라는 것 자체가 일의 연장선임을 진정 모르는 것일까 생각했다. 미지근한 물 한잔을 마시고 메일을 확인해보려는데 입사동기 성연의 전화가 왔다.
“어, 성연씨. 무슨 일이야?”
“어! 웬일이야. 매번 여보세요 하고 딱딱하게 받더니. 다른 게 아니고 메일 받았냐고.”
“응, 지금 열어보려던 참이야. 뭐 급한 거야? 이렇게 전화를 다 주고.”
“급한 거라기보단 외국인 협업 프로젝트라나 그런 건데 자기랑 나랑 하게 되었더라고. 그래서 연락해봤어. 무슨 주말이 이러냐. 아무튼 메일 확인하고 시간 잡아서 기획 좀 짜보자고.”
이렇게 정신없는 아침도 없을 거라며 눈을 한번 지그시 감았다 떠보니 클라이언트가 보낸 메일이 와있었다. 내용인즉슨 관광을 통한 지역의 문화 익히기라는 주제의 행사를 맡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거였다. 그리 기획만 탄탄히 짜면 그리 어렵지 않은 프로젝트였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프로젝트 담당자가 자신과 성연이라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민주와 입사동기인 성연은 늘 비슷한 업무를 맡았기에 항상 비교, 평가의 대상이었다. 물론 민주의 자격지심이라면 자격지심이었겠지만 민주는 이번 프로젝트 담당이 외국인인 것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성연은 화려한 어학연수 스펙을 가지고 있었으나 민주는 비행기라고 타본 것은 제주도를 갔다 온 것뿐이었다. 민주는 쓴 한숨을 내뱉었다. 어쩐지 성연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전화한 것이 참 얄미웠다.
민주와 성연은 각자 관광 지역을 선정하고 지역의 문화에 대해 조사하기로 했다. 민주는 강진청자를 떠올렸다. 우연히 들렀던 강진에서 외국인들의 청자 만들어보기 체험을 본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강진청자 만들기 체험? 무슨 애들도 아니고. 외국인들이라고 해서 어린이들이 아니야. 이게 뭐니?”
참. 말 한마디도 얄밉다. 청자 만들기 체험이 무슨 어린이들만 해야 하는 대표 프로그램도 아닌데 저렇게 길길이 날뛴다.
그렇게 두 파트로 나누어 각각 10명의 외국인들과 함께 자신이 기획한 일정대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민주는 말이 좀 어색했지만 그만큼 외국인들의 말을 들으려 노력했고 더 세심한 준비를 했다.
흙을 만져본 느낌, 청자에 대한 첫 생각 등을 참 편안하게 나누었다. 그리고는 각자가 만든 도자기에 자신이 새기고 싶은 문구나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새기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외국인들은 흥미로워했고 꽤 진지하게 문구를 생각했다.
프러포즈 내용을 쓰기도 하고 자신의 다짐을 쓰기도 했다.
그새 정이 들었는지 외국인 한명 한명에게 좋은 추억이 되었을까 진심어린 걱정이 되었다. 고맙게도 외국인들은 이번 체험에 만족했고 즐거운 추억을 안고 돌아간다며 고마워했다. 그렇게 프로젝트는 성공리에 마쳤다.
그날 아침은 생각보다 상쾌했다.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도 산뜻했고 햇볕도 그다지 따갑지 않았다.
‘택배요’
택배? 주문한 게 없는데.
손에 안겨진 것은 다름 아닌 서툰 글씨가 새겨진 청자였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정말이지 추억은 국경을 넘어선다.
월출산에 올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달이 떠오르는 산’이라길래 이름마냥 고요하고 아름다울줄 알았는데, 웬걸, 기암절벽에 바위 천지, 산세는 또 어찌나 험한지!
“이 산이 원래 이렇게 험한 거야, 아님 내가 가는 이 코스만 험한 거야?”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검색을 시작했다.
“월출산, 우리나라에서 풍수지리상으로 기세가 가장 센 산? 아, 내가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구만. 게다가 구름다리 코스가 가장 난코스? 아아악, 젠장!”
당장이라도 휴대전화를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따 아내와 통화를 해야 하니까. 싸우고 꼴 보기 싫어도, 집에는 같이 가야한다. 한 집에 사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꼬일 줄 알았으면 아내와는 같이 안왔을텐데. 그는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처음부터 월출산에 가는 걸 싫어했다. 이왕 여름휴가를 받아 쉴 거면 산 보다는 바다가 좋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가지도 않은 산악 캠핑장에 푹 빠져 있었다. 그의 아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망할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한민국 남자들을 전부 된장 캠퍼로 만들어 놨어...’
게다가 전국의 술이란 술은 다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인데, 하필 영암에는 그가 아직 섭렵하지 못한 술이 있었다. 그래서 목적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영월이 됐다. 도대체 그냥 막걸리도 아니고, 무화과 막걸리가 뭐길래!
남편의 소원대로, 그들은 월출산 캠핑장에서 무화과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는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처음에는 툴툴거리던 아내도 한 사발, 두 사발 받아먹더니, 혼자 한 동이를 다 비웠다. 그렇게 둘이서 세 동이쯤 먹었을까? 혀가 살짝 꼬인 채 남편이 말했다.
“야, 너는 그렇게 오기 싫어하더니, 이렇게 맛나게 출을 처마시냐? 너 인제 내가 하는 말에 토 달지마 이 여편네야.”
“야, 너 지금 말하는 스타일이 왜 그 모양이야. 너 잊었어? 난 지금도 산이 싫어. 벌레는 왜이리 많고, 저 깎아지른 듯 한 산세는 뭔데? 네가 언제 내가 원하는 대로 말 들어준 적이나 있어? 내가 참아주고 사니까 이게 그걸 당연한 줄 알아. 뭐 그리고 술을 쳐 마셔? 그래, 나 아주 상스럽게 처마시고 있다. 너 때문에 열 받아서 술이 아주 그냥 술술 들어간다. 됐냐?”
사실 남편은 말을 입 밖으로 뱉는 순간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아, 입이 방정이다. 오늘 분위기잡고 첫째 만들려고 했는데, 이거 뭐 분위기고 뭐고, 내일 무사히 집에나 갈 수 있음 다행이게.’
결국 아내는 텐트에서, 그는 해먹에서 잤다. 2세 만들기는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함께 나란히 오르기로 한 월출산을 따로 나섰다. 아내는 바람폭포 쪽으로, 남편은 구름다리 쪽으로.
월출산 캠핑장에서 구름다리까지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그러나 구름다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산새는 무엇인가; 한 시간 밖에 안 걸었는데도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있었다. 게다가 남들은 고어텍스 옷이며 등산용 스틱이며 만반의 준비를 하며 걷는데, 그의 무기는 달랑 등산화뿐이었다. 걷다가 벌써 생명의 위협을 몇 번이나 느꼈던가! 긴장감에 물을 마구 들이켰더니, 물도 벌써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구름다리는 정말 장관이었다. 밥로스 아저씨가 나이프로 휙휙 휘저어 그린 듯한 바위절벽 사이에 끝도 보이지 않게 긴 다리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공포가 밀려왔다. 한참동안 다리 입구에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난간을 꼭 잡은 채 한 발 두 발 걸어갔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경치는커녕 눈을 어디에도 돌릴 수 없었다. 간신히 눈을 돌려 난간을 잡은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다, 그는 깜짝 놀랐다. 난간에는 매직으로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떨어져라.’
그는 꽁지에 모터가 달린 듯 건너편을 향해 걸어갔다. 차원이 다른 공포였다. 산의 기운이 짓누르기 전에 산과 산을 잇는 이 허공에서 도망가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구름다리 건너편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꺼냈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딸칵. 왜?”
“너 어디야, 바람폭포야?”
“아니, 나 천황봉 거의 다 왔는데? 이제 내려갈 거야. 끊어.”
“야야야야야! 너! 아니, 미안하다.”
“너 왜 그래, 약먹었어?”
아내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오만생각이 떠올랐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 떠오르는 건 역시 마누라밖에 없구나. 지가 아무리 기가 세고 바가지를 긁는들 그 기운이 월출산만큼 뻗치진 않으니. 적어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진 아니하잖나. 악처라도 처가 있는 게 낫다고, 감사하며 살자.
“아냐. 생각해보니까 그냥 미안해서. 나 인제 구름다리니까 조금만 기다려. 사랑한다.”
“놀고 있네... 빨리와. 투둑. 뚜.뚜.뚜.뚜...”
아이스크림, 초콜릿, 딸기우유……. 아이는 할아버지 댁에만 가면 기다렸다는 듯 할아버지 손을 잡고 슈퍼로 향한다. 평소에는 군것질거리를 사 먹이지 않으니 이때다 싶은 것이다. 슈퍼에 도착하여 고른 것들은 온통 단것들이다. 당당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서는 의기양양하게 과자들을 품에 쏙 넣는다. 내가 빼앗으려고 하면 할아버지 품으로 쏙 숨는다.
“아빠도 참, 애가 떼를 써도 이렇게 단거 막 먹이면 안 된다니까.”
“자주 먹이지도 않는데 뭘 그러냐. 그리고 애들 때는 다 이런 거 먹고 싶은 거야. 그리고 꼬맹이가 이렇게 매달리는데 할애비가 되가지고 어떻게 모른 척하냐?”
“그걸 노린 거라니까. 아빠, 요즘 애들 다 유기농이다 몸에 좋은 것들만 먹이는 거 몰라요? 이렇게 슈퍼에서 파는 거 입맛 들면 못쓴다니까. 과자도 마약과 같은 거야. 먹다보면 계속 먹고 싶어진다니까.”
“유난은, 너도 다 이런 거 먹고 자랐어.”
“요즘 애들은 피부가 연약하고 아토피 그런 것도 잘 생긴단 말이야.”
“알겠다, 알겠어. 그럼 저기 곶감을 가져다 줘야겠구나.”
아이가 귀여운 얼굴을 하고 애교를 떨면 어찌 안 넘어가고 배기겠는가. 자식보다 손주새끼들이 더 끔찍하게 예쁘다는데.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가 사달라고 하는 걸 딱 잘라 거절하기 어려우셨을 것이다. 더군다나 늦게 결혼한 딸내미가 노산으로 힘겹게 얻은 자식이니 친정 부모로서 말은 안 해도 애를 많이 태우신 모양이다. 그래서 아이를 만지면 닳을까 애지중지 하신다. 구부정한 허리는 이제 다시 반듯해지기를 포기한 화석처럼 굳어져 있고 지팡이 없이는 오래 걸으시지도 못하지만 아이와 함께라면 힘든 줄도 모르신다고 한다. 요즘말로 손주바보가 따로 없다.
아이를 불러 곶감을 내미니 아이는 냄새부터 킁킁 맡아본다. 감을 말린 것 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먹는 건지 아닌지 확인부터 하는 것이었다. 할아버지가 맛있다고 먹어보라고 해도 뒷걸음질을 칠뿐이다. 그러자 좋은 묘책이 생겨났다는 듯 아이를 무르팍에 눕히더니 재미있는 곶감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이다. 아이는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말에 냉큼 할아버지 무릎에 누웠다.
“옛날 옛날에 호랑이 한마리가 먹이를 구하려고 마을 어귀까지 어슬렁어슬렁 내려왔단다. 그런데 어느 집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크게 들리는 게야. 그래서 아기 엄마가 아기에기 "귀신 온다." 그랬지, 그랬는데도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어. 그래서 이번에는 "호랑이 온다."그랬지. 그랬는데도 아기는 더욱 크게 우는 것이었지.
그래서 이번에는 "곶감 줄까?" 그랬더니 아기가 울음을 딱 그쳤다는 거야. 그것을 들은 호랑이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호랑이인 줄 알았는데 자기보다 더 무서운 것이 곶감이로구나 생각했지. 그 뒤로 곶감소리만 들리면 뒤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쳤다는 구나.“
우와. 하고 탄성을 지르더니 아이는 이내 할아버지 손에 들린 곶감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아이들은 역시 단순하구나 생각하면서도 아이의 순수함에 웃음이 났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곶감이 자기 앞에 있다고 신기하다며 한입 베어 문다.
생각보다 단맛이 돌아서인지 아이는 과자를 내려놓고 곶감을 찾았다. 곶감이야기 때문인지 아이는 그날이후로 곶감할아버지네 가자고 한다. 그러면서 할아버지 손을 잡고 슈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말려놓은 곶감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성화다. 혹 떼려다 혹 붙였다며 껄껄껄 웃으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니 엷은 미소가 지어졌다.
“곶감 하나 줄까?”
“웅 할아버지, 재미있는 이야기도!”
“자. 그럼 시작해볼까? 옛날 옛날에~”
붉은 입술, 검은 머리카락, 깊은 눈매를 가진 여인. 초연한 눈빛이 자못 경건하기까지 하다.
사각사각 꽃잎가루를 곱게 빻는다. 사각사각 더 곱게 갈아준다. 꽃잎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유난히 희고 맑은 피부에 분홍빛으로 분칠을 하며 단장을 한다. 붉은 입술은 꼭 다물어 더욱 붉어 보인다. 참빗을 이용하여 머리까지 곱게 빗으니 단장이 끝났다. 거울을 들여다본다. 굳게 다문 입술을 조금 더 꼭 다물어본다.
5세가 되던 해 아비는 죽었다. 아비가 죽고 난 뒤 고약한 집의 민며느리로 팔려갈 뻔하다 겨우 빠져나와 경상도 우병사가 된 최경희의 첩으로 살기까지. 수많은 전투 속에서 자결에 이른 최경희의 빈자리까지 논개는 수많은 눈물을 흘렸었다. 나라는 혼란스러웠고 피비린내는 상황 속에서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어려웠다.
닷새 전 집안일을 돌보는 곱단이를 불러 세웠다. 전에 곱단이가 가지고 싶다고 하던 비단 천을 내밀며 네 가락지와 맞바꾸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곱단이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바꾸어 주었다.
“얼마 전 저잣거리에서도 가락지 몇 개 사지 않으셨어요? 요새 왜 이렇게 가락지에 욕심을 내신다요?”
“가락지가 예쁘지 않니? 예쁘기도 하고 단단하기도 하고.”
“단단하다고요?”
“왜 혼례를 치를 때 가락지를 주고받는 줄 아니? 그게 바로 다 부부간에 단단한 믿음과 신뢰로 살아가자는 약속 때문에 그렇단다. 그래서 이 가락지는 단단한 거지. 끊어지지 않고.”
“그런 거래요? 그래도 전 요 부드럽고 고운 비단이 더 좋구먼요.”
가락지를 받아들던 논개의 얼굴빛은 한층 어두워졌다. 열 개의 가락지가 다 채워졌다. 바람이 더욱 쌀쌀하게 불었다.
눈물은 보이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멀리서 풍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고 역겨운 기름 냄새와 피비린내 비슷한 냄새가 섞여 속이 울렁거렸다. 방바닥을 짚고 일어서는데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내색하지 말아야 했다. 웃는 얼굴을 하고서 손에 가락지를 끼웠다. 열 손가락 마디마디에 치장을 마쳤다. 누가 봐도 어여쁜 기생처럼 보였다.
밖은 시끄러웠다. 촉석루에서는 이미 흥이 한 판 벌어졌고 기름진 고기를 입가에 묻히고 먹는 왜장들이 보였다. 큰소리로 웃으며 술을 부어 마시는 꼴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조용히 왜장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고하게 한쪽 다리를 올리고 분위기를 살폈다. 누구하나 술에 취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으나 쉬이 행동을 취했다가는 일을 그르치기 쉬웠기 때문에 분위기를 잘 봐야했다.
결심에 선 논개는 남강이 유유히 흐르는 낭떠러지에 요염한 얼굴을 하고 서있었다. 거나하게 술에 취한 장수들이었으나 아찔한 낭떠러지 앞이라 그런지 누구 하나 섣불리 논개 쪽으로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그때 늠름한 체구를 가진 왜장 하나가 걸어왔다. 논개는 미소를 띠었다. 바람에 몸을 실어 왜 장수를 낚아채듯 힘껏 안았다. 술에 취한 장수는 덩치에 못 미치게 휘청거렸다. 논개는 찰나의 순간 만 길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졌다. 열 개의 가락지 사이로 손가락이 팽팽하게 늘어났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강 속으로 두 눈을 질끈 감은 붉은 혼이 빨려 들어갔다.
‘그래서 가락지는 단단한 거지. 끊어지지 않고.’
안녕? 마일로. 나 동호야.
벌써 네가 우주로 간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어. 벌써 보고 싶다. 너와 처음 만난 날은 절대 잊을 수 없을 거야. 쪼글쪼글한 얼굴에 귀여운 외모를 가진 너는 나보다 키가 훨씬 작아서 난 네가 개미인 줄 알았다니까.
고인돌 앞에서 우연히 널 처음 만났을 때 네가 하도 작아서 내가 널 밟을 뻔한 것도 기억이 생생해. 그땐 정말 아찔했는데 말이야. 그때 넌 머나먼 별에서 왔다고 하며 이곳이 어딘지 물었었지. 특히 넌 고인돌을 보고 이 큰 돌이 무엇이냐고 신기해했었지.
널 우리 집으로 몰래 들여보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것이 생각나. 넌 내가 사는 지구 그리고 우리 마을에 대해 궁금해 했고 난 네가 살고 있는 우주에 대해 궁금해 했었지. 그래서 우주에서 온 너를 위해 나로우주센터과학관에 널 데려갔었지. 그때 넌 정말 신기해하면서도 집에 가고 싶어 했던 것이 생각나. 그리고 난 과학자를 꿈꾸고 있기 때문에 널 만난 것을 참 행운이라고 생각했어. 너에게 직접 우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우주과학센터에서 보는 것들에 대해 너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
그리고 넌 우주로 오는 지구인들을 봤다는 이야기도 했었지. 그때 넌 정말 신기해했는데. 지구인들은 우주에 오면 신기한 옷을 입고 생활한다면서 말이야.
우리 고흥은 특히 과학의 도시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 고흥에서는 100kg급의 인공위성으로 지구 저궤도에 진입시킬 수 있는 한국 최초 우주발사체 나로호 발사 준비에 한창이었지. 사실 1차와 2차를 발사했었지만 아쉽게도 실패했었어.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3차 준비에 매진하던 시기였어. 그때 널 만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넌 왜 고흥에서 나로호를 발사하는 것이냐며 궁금해했었지? 그건 발사장 주변의 안전과 발사각도, 발사장의 여러 시설의 설치 등을 생각해서 발사해야 하기 때문이야. 특히 우리 고흥은 발사운용 각도가 15도로 넓고 발사체를 발사했을 때 발사체의 추락과 같은 국제적인 문제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들었어. 나 꽤 똑똑하지? 네가 다시 우주로 돌아가고 더욱 우주와 과학에 대해 궁금해졌어.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
아참! 나 너와 약속했던 비밀 아직도 지키고 있어. 바로 3차로 발사될 나로호에 널 몰래 태운 말이야.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두근거린다니까. 나로우주과학관에서 나온 넌 네가 살던 별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면서 눈물을 보였었잖아. 그때 나도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었어. 그래서 생각했지. 네가 우리 마을로 떨어진 날이 1월 28일이었잖아. 그런데 1월 30일에 나로호 3차 발사가 예정되어있었어. 그래서 널 몰래 나로호에 태웠었지.
그래서 나로호가 발사되는 것이 나에게는 더욱 뜻깊은 일이 되었어. 네가 나로호에 탄 것은 아마 우리나라 사람 아무도 모를 거야. 그리고 난 네가 나로호에 탔기 때문에 3차 발사에 성공하길 더욱더 간절하게 바랐어.
나로호 발사를 몇 분 남겨놓지 않고 너와 작별인사를 했을 때가 생각나. 널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야. 그래도 널 너의 별나라로 보내줄 수 있어서 기뻤어. 그리고 나도 더 열심히 공부해서 2021년에 다시 한 번 발사될 한국형 발사체에 탑승해 널 꼭 다시 만나고 싶어. 너와 함께 보냈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될 거야.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어. 비록 너의 소식을 들을 수는 없지만 네가 잘 도착해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그럼 다음에 또 만날 때까지 안녕. 동호가.
저녁때가 다가와 장 보러 나갈 준비를 하자 어린 아들이 또 마트에 가자고 성화였다.
“엄마는 마트 말고 시장 갈 거야. 같이 갈래?”
“싫어! 시장은 냄새난단 말이야!”
아이가 잔뜩 토라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내 오늘 저 녀석의 볼기짝을 때려 주리라 결심하고 뒤를 홱 돌아보았는데, 일곱 살 밖에 안 된 쪼끄만 게 눈치는 또 삼단이라 벌써 제 방으로 도망쳐버렸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아주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내게 모든 애정을 쏟아 부으셨다. 최신 전자기기를 반에서 가장 먼저 갖게 되는 것도 언제나 나였고, 가정부 아주머니가 말끔히 다려 준 교복을 입고 등교했으며, 방과 후 교문 앞에는 항상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아저씨가 있었다. 친구들은 모두 나를 부러워했고, 내 환심을 사려 노력했다. 남들에게 없는 것도 다 있었고, 갖고 싶은 것이라면 언제든지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영화 속의 여주인공처럼 나날이 콧대가 높아져만 갔다.
어느 날은 교문 앞에 나를 데리러 온 기사 아저씨가 없었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두 시간을 기다려도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다. 아버지께 이 일을 다 일러바쳐서 혼쭐이 나게 해 주리라고 벼르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 안이 소란스러웠다.
“영희야, 넌 안에 들어가 있어라.”
한 번도 내게 엄한 얼굴을 보인 적이 없던 아버지였는데, 표정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었다.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엿들었다. 아버지의 친구에게 명의를 빌려 준 일이 있는데, 모르는 새에 아버지 앞으로 빚이 엄청나게 쌓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가게를 팔고 새로 사업을 시작하겠다며, 나를 할머니께 맡기고 어딘가로 떠나셨다.
갑작스레 시골로 전학을 가게 된 것은 불만이었지만, 전에 사 두었던 워크맨 같은 것들이나 외국에 다녀온 이야기들로 쉽게 새 친구들의 환심을 살 수 있었다. 나는 빠르게 새 학교에 적응할 수 있었고, 학교에서는 모두들 나를 부잣집 딸로 알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오면 고기반찬이 하나도 없는 밥상 앞에 앉을지라도, 학교에서만은 여전히 내가 공주님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게 큰 약점이 하나 생겼다. 바로 할머니가 나물 장수라는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맡아 키우시게 된 이후로 밤낮 없이 나물을 캐러 다니셨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싫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매일같이 내 교복을 다려주셨지만, 우리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보다도 낡은 옷을 입은 할머니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하교하던 나는 저 만치 멀리 길바닥에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발견했다.
“우리 강아지, 지금 끝난 거여?”
할머니는 내게 반갑게 손을 흔드셨지만, 나는 친구들 앞에서 ‘이상한 할머니네.’하고 시치미를 뗐다. 할머니는 내가 보낸 경멸의 시선을 빠르게 알아차리셨고, 내가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아예 고개를 푹 숙이고 계셨다.
이 년이 지나고, 어느 정도 가세가 회복되어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까지 나는 한 번도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나물을 다 팔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신 할머니는 항상 웃는 얼굴로 내게 저녁상을 차려 주셨다. ‘우리 강아지, 배고팠지?’하시면서 말이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있는데, 내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내 철없던 행동들을 반성했지만,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걷다 보니 어느 새 시장 입구였다. 간판까지 내 걸고 깔끔하게 새 단장을 마쳤지만, 거기에 서 계시는 노인들의 모습은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아이고, 오늘도 나오셨네. 봐봐. 오늘은 고사리가 아주 싱싱해.”
허물없이 건네는 인사들과 웃음이 오갔다. 나는 이 반듯한 신식 시장과 그 안에서 어우러져 피어나는 구수한 웃음들을 보며, 새침데기 고등학생이던 나와 우리 할머니를 떠올린다. 그 때 웃으며 할머니께 인사를 드릴 수 있었더라면, 할머니와의 추억이 몇 갑절은 많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우리 동네에는 더 많은 마트가 들어서겠지만, 나는 그 때에도 골목을 누비며 시장을 찾아 낼 것이다. 그리고 그 귀퉁이 어딘가에서, 또 어느 할머니에게 나물 한 봉지를 사야지. 그런 생각들을 했다.
문득 끝이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너와 나의 끝. 그리고 이 기나긴 싸움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말이다. 일기예보에서는 분명 별똥별이 떨어진다고 했는데 오늘도 예보는 어긋났다. 남자가 별똥별을 기다린 탓일 수도 있다. 남자가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아니 하늘을 보고 별똥별을 기다리지만 않았어도 그날 떨어지기로 한 별똥별은 떨어지며 많은 이들에게 환희의 순간을 선물하였을 수도 있고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어지게 하였을 수도 있다. 남자는 언젠가부터 자신이 무언가를 바라고 기대하면 얄궂게 빗나가곤 했다. 그것이 우연의 일치라고하기엔 야속하리만큼 지속적인 반복이었다.
“오늘도 꽝이네.”
남자는 복권에 당첨되지 않은 사람처럼 아쉬워했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심 기대가 되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덩그러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왠지 검지도 푸르지도 않았다. 날씨가 제법 쌀쌀했고 남자는 입고 있던 재킷의 옷깃을 여미었다.
남자의 도전은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몇 년째 사실상 백수로 지내고 있는 것도 남자에게도 남자의 가족에게도 가시방석과 같은 나날이었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남자의 취업은 쉽지 않았다. 남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잠을 자거나 책을 읽을 때 남자는 항상 영어단어를 외우거나 제2외국어인 중국어 테이프를 들었다. 일 년 그리고 이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깊은 산 속 절에 들어가 공부를 해볼까 생각도 했었다. 항상 2차 면접까지는 무난히 통과했으나 결국엔 떨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남자도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는 듯했다. 남자는 문득 떠나고 싶어졌다. 어디로든. 항상 중국어가 나오던 MP3에 잔잔한 발라드로 감성을 채웠다.
남자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끝이 어딘지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은 홀로 걷기 좋은 곳이었다. 숨을 가슴 가득 품어보았다. 가슴이 부푼 모습이 얼마만인가 싶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남자의 어깨는 좁아졌고 초라해졌다. '후'하고 숨을 내쉬었다. 가슴가득 품고 있던 공기가 일순간 밖으로 품어져 나오니 가슴이 후련했다. 사람이 북적이지 않아 더욱 깨끗한 공기가 남자의 양 볼을 스쳤다. 쉬엄쉬엄 뚜벅뚜벅 걸어갔다. 날이 저물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이 없었고 다음날 있을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압박도 없었다. 그저 끝이 보일 때까지 걸어가야 하는 것. 그것이 지금 남자가 치러야할 시험이자 강박이었다. 그것쯤은 별것 아니었기에 남자는 더욱 느릿한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한참을 걷다보니 멀찌감치 관호산성이 보였다. 늠름하고 호젓한 자태가 남자와는 다르게 당당해보였다.
치열함이 감돌던 곳. 남자도 항상 치열하게 살아왔기에 이곳의 고요함에서 소리 없는 갈등이 느껴졌다. 두려움에 떠는 많은 사람들의 비명과 그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함성이 뒤섞였을 이곳.
남자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치열했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성과 없이 치열하게 살아온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할지 모르지만 남자는 후회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다시금 어깨를 펴보았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다음날을 걱정했다. 다음날을 걱정하고 나면 그 다음날이 걱정이었다. 남자에게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늘 걱정의 반복이었다. 그런 남자가 여유를 찾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날이 흐려져도 어두워져도 걱정하지 않았다.
발로 흙을 비벼보았다. 이렇게 흙길로 난 길은 누가 만든 것인지 궁금해졌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길을 걸어가는 것 길 자체가 표지판인 셈이었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면 다른 길로 빠질 염려가 없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는 걱정할 것이 없었다. 조금 늦어지면 어떤가, 도착할 곳이 남들과 조금 다른 곳이면 또 어떤가.
남자는 다시 한 번 가슴에 숨을 가득 머금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숨을 내뱉었다. 하늘은 맑았다. 해가 지고 난 자리에 스며든 어둠은 따뜻했다. 여전히 검지도 푸르지도 않은 빛이었지만 오늘이라면 별똥별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별똥별은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눈으로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렸다.
남자는 여기가 이 길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난 흙길이 조금 남아있지만 남자에게 이 길의 끝은 이곳이었다.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
남자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조금 더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