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오늘은 날씨가 제법 쌀쌀한걸 보니 비가 내린다면 눈으로 바뀔 것 같았다.
날씨가 흐리면 안 될 텐데 하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차에 남자친구가 오후에 날 갠다는 희소식을 전했다.
사람들 마음속에도 연말이라는 뜬 구름이 가득 차있는 듯했다, 거리마다 사람들은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있었고 오늘이 세상 끝 마지막 날이라도 된 것처럼 무엇인가를 하려고 노력했다. 특별히 어디를 가지 않는다고 해도 제야의 종소리는 들어야 한다며 종로 2가로 모여들 것이다. 사실 특별할 것 없이 지나가는 하루일뿐임에도 사람들은 굳이 무엇인가를 하며 추억의 액자를 못박으려했다. 언젠가는 잊힐 무심한 다짐들과 함께.
여자도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이번 남자친구와 처음 맞는 새해였기 때문에 여자는 더욱 들떠있었다. 여자는 아침부터 12월 31일의 코스를 짜기 시작했다. 오전에 만나서 간단히 브런치를 즐긴 뒤 점심은 좀 더 특별하게 도시락이 어떨까? 저녁은 정말 근사한 곳에서 칼질을 한 뒤 12시에 맞추어 종로로 가는 일정이었다. 친구들과의 여행에서도 이렇게 짜임새 있는 일정을 짜본적이 없던 그녀였다. 남자친구도 그녀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노력했다. 카페에 앉아 점점 맑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남자는 여자에게 선뜻 제안을 하나 했다.
“오늘 우리 해돋이 보러갈까? 너랑 해 뜨는 거 보고 싶은데.”
“해? 음, 나 외박 안 되잖아. 너도 알면서. 우리 엄마 아빠 난리 나실걸.”
“그럼 새벽에라도 출발하면 되잖아. 응? 해돋이 보러가자.”
남자는 좀처럼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여자도 해돋이를 보러 가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지만 새해라고 해서 구름떼처럼 몰려오는 사람들과 술 냄새인지 땀 냄새인지 뒤섞여 콧물은 주르륵 흐르고 몸을 오들오들 떨며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소리소리 지르는 아저씨들 틈 사이에서 새해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여자는 코를 한번 훌쩍이며 ‘이따 상황 봐서’라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남긴 뒤 화제를 돌렸다.
여자의 짜임새 있던 일정대로 둘은 간단히 브런치를 즐긴 뒤 여자가 정성스럽게 싼 도시락까지 먹었다. 이제 남은 건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 종소리를 들으러 갈 것인지 해돋이를 보러 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여자는 남자가 시간이 지나면 귀찮아 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애국가를 통해서 나오는 일출도 볼만하다고 여길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쉽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남자는 평소에 고집을 부리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여자는 오늘 특별히 남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무슨 다짐을 얼마나 거창하게 하려고 해돋이까지 보러갈까 싶었다.
“좋아, 가자. 해보러. 말갛게 떠오르는 해, 보자구.”
“가기로 한 거야? 고마워. 담요랑 손난로도 준비했지.”
남자는 활짝 웃었다. 가지말자고 떼를 썼다면 남자가 많이 실망했겠다 생각했다. 담요랑 손난로까지 준비한 것을 보니 더욱 그러했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연신 하품을 하는 여자를 향해 남자는 눈 좀 붙이라고 했지만 여자는 무거운 눈꺼풀을 끔벅이며 시계를 들여다봤다.
오전 4시 43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남자는 곧 도착이라고 말했고 여자는 으응 이라고 대답했다.
예상대로 사람들은 많았다. 가족, 연인들로 저마다 들뜬 표정을 지었다. 해가 떠오를 때 무슨 다짐을 할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넌 해 뜰 때 무슨 다짐할거야? 담배는 안 피우니 금연은 아닐 테고, 다이어트? 아님 승진?”
“그런 거 말고 있어. 비밀이야. 안 알려준다고.”
“치, 우리사이에 비밀이 어디 있어. 빨리 이야기 해줘 응?”
여자가 남자에게 딱 붙어서 이야기를 할 때 저 너머에서 붉은 해가 비쳤다. 사람들은 웅성웅성하며 한 곳을 응시했다.
검고도 붉은 해를 보니 괜스레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멋지다.”
쉿.
여자가 말을 하려는데 남자는 여자의 말을 막았다. 해는 이미 떠오르고 어스름히 새벽이 밝아왔다. 여자는 참았던 졸음이 몰려왔고 남자는 끝내 어떤 다짐 그리고 소원을 빌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여자의 손을 잡아줄 뿐이었다.
다섯 살 때 무렵이다. 나는 동네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무서움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차마 ‘엄마’를 목 놓아 부르지도 못했다. 그저 나중에서야 엄마를 보고 난 뒤 안도감에 참았던 설움과 공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릴 뿐이었다. 엄마는 내 엉덩이를 팡팡 때리면서 엄마도 놀람과 안도감을 내려 보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아직 사그라지지 않는 두려움 때문에 눈물을 찔끔찔끔 흘렸다. 그럴 때면 엄마는 집으로 돌아와 싱싱한 딸기를 생크림에 듬뿍 찍어 주셨다. 그럼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하게 눈물을 훔치고 딸기 한 접시를 뚝딱하고 비웠다.
어려서의 기억이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담겨있어서 일까, 나는 여전히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 찰 때면 딸기를 먹었다. 수능시험을 칠 때. 처음 남자친구와 첫 키스를 하던 날.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면접을 볼 때. 나는 마음속으로 딸기를 되뇌었다. 그럴 때면 자연스레 입안에 침이 고였다.
서울에서 자취를 하던 나는 주말이 되어서야 집에 내려갔다. 자취 생활이 어느덧 몸에 익숙해지자 주말에만 가던 것도 줄어들어 한 달에 한번 혹은 두 달에 한번 꼴로 집에 내려갔다. 엄마가 항상 전화로 안부를 물으며 집에 내려올 것을 당부했지만 알겠다고 한 뒤 당일 일이 생겨서 못 간다는 식으로 한 달 그리도 두 달을 보냈다. 내가 집으로 곧장 달려간 것은 아빠의 전화를 받은 후였다.
‘네 엄마 지금 쓰러졌어. 여기 병원이야. 얼른 집으로 내려와.’ 내가 아무리 집에 소홀하고 엄마에게 소홀했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냐며 꿈속을 헤매고 있는 엄마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간호사는 환자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나와 엄마를 분리시켰고 나는 마구잡이로 엄마를 흔들어댔다. 결국 면회시간도 다 못 채우고 병실 밖으로 쫓겨났다. 담당 의사는 엄마가 지금 혼수상태라고 했다. 언제 정신이 돌아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혼수상태라고 하면 한 달 혹은 일 년 그것도 아니면 기약할 수 없는 언젠가를 바라면서 잠들어있는 상태가 아닌가. 어떻게 이런 일이.
병원 복도 끝에 그만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다. 머리를 큰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엄마가 왜? 아니. 나에게 왜 이런 일이.
간호사에게 사정사정하여 잠깐 동안 얼굴만 보고 나오겠다고 빌었다. 간호사는 안 된다고 말했으나 그녀도 사람인지라 아주 잠깐동안만이라는 전제하에 허락을 해주었다.
“엄마. 내 말 들리지? 엄마 지금 자고 있는 거니까 내 말 다 알아 듣고 있는 거지? 엄마 그 동안 많이 힘들었어? 왜 이렇게 갑자기 쉬고 싶어진 거야? 응? 엄마, 한숨 푹 자고 나면 이제 지겨워서라도 일어날 거지? 일어나서 나랑 같이 쇼핑도 하고 요리도 하고……. 그래! 엄마랑 내가 좋아하는 딸기 생크림에 듬뿍 찍어 먹어야지. 응?”
엄마, 제발 눈 좀 떠봐, 내말 안 들려?
엄마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된지도 벌써 한 해가 흘렀다. 주위에서는 이제 그만 엄마를 보내주는 것이 어떠냐는 말이 귀에 잠잠히 들려왔지만 나는 믿는다. 그저 엄마는 꿈속에서 너무 좋은 일들이 많아서 아직 깨고 싶지 않은 걸 거라고. 내게 줄 딸기를 모조리 따오느라 늦는 걸 거라고.
병실에 들어서기 전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다. 엄마 손이 아직 따뜻하잖아. 그걸로 된 거 아니야? 아주 조용히 엄마에게 집중하면 엄마가 가끔 코를 고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니 나는 아직 엄마를 보낼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열매가 익을 무렵이 아니라는 것에 희망을 건다. 엄마는 딸기가 빨갛게 열매를 맺을 때면 분명 눈을 뜨실 것이다. 그리고는 울고 있는 나를 달래려 따뜻한 생크림을 듬뿍 찍은 딸기를 건네며 ‘많이 무서웠지? 이제 괜찮아.’라며 그동안의 설움을 다독여 줄 것이다.
오래된 수탁의 아침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삐거덕 하는 문을 열고 조용한 걸음걸이의 소녀 설화가 나왔습니다. 마을에서 설화라는 소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효녀로 소문이 나있었지요. 설화는 아픈 아버지와 어머니를 대신해 마을일을 돕고 바느질 삵을 받아 근근이 살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번 돈으로는 반찬은 가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쌀을 사기도 힘들었답니다. 소녀 설화는 마을일을 도와드리며 반찬 조금씩을 얻어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소녀가장이 된 설화의 착한 심성과 딱한 사정을 아는 마을사람들은 집에 있는 반찬을 조금씩 바가지에 담아주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사람들의 반찬을 따로 담을 수 없어 그만 한 바가지에 나물들이 전부 섞여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도 반찬들을 얻었다는 기쁨에 한달음에 달려간 설화는 나물들이 섞인 바가지에 밥을 넣어 숟가락으로 비벼 상을 차렸습니다. 부모님께 이렇게 밖에 상을 차리지 못했다는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지요. 설화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처음 보는 생소한 밥에 두 눈이 휘둥그레 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먹어보니 그 맛도 맛있고 다른 찬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어서 더 잘됐다고 설화를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설화가 막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낯선 행색의 웬 남자가 설화의 집 앞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행색을 보니 이 동네 사람은 아닌 듯싶었지만 사람을 구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되어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우선 물을 먹여 목을 축이게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남자가 정신을 차리고는 고마운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달리 내 드릴 것이 없던 설화는 금방 얻어온 반찬들과 산에서 캐온 나물들을 섞어 고추장과 함께 내드렸습니다.
“소녀, 집안 살림이 누추하여 이런 것 밖에 내 드릴 것이 없사옵니다. 송구스럽습니다.”
남자도 생전 처음 보는 밥상에 잠시 놀랐으나 고추장에 쓱쓱 비벼 맛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맛도 맛이지만 밥에 들어간 나물들이 모여 이만한 영양가를 내는 밥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밥의 이름이 무엇이냐? 혹, 밥을 이렇게 만들게 된 경위를 내게 알려줄 수 있겠느냐?”
“이 밥에 이름은 달리 없사옵니다. 사실….”
설화는 집이 가난하여 이웃사람들에게 얻은 반찬이 우연히 섞여 밥과 함께 먹은 것이라고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허허. 그것 참 딱하면서도 놀랄 일이구나. 사실 나는 궁에서 시찰을 나온 암행어사니라. 아까는 잠시 현기증이 나 쓰러져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너를 만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런 천한 음식을 내 드렸으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니다. 밥과 함께 갖가지 나물들을 비벼먹는다... 비빔밥이 좋겠구나!”
“네? 비빔밥이요?”
“그래, 이 마을이 전주이니 전주비빔밥이 좋겠구나.”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암행어사가 다시 설화의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왕실의 수라간 나인이 되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이 드시는 음식을 손수 차릴 수 있다는 생각에 승낙한 설화는 궁으로 들어갔습니다. 궁에는 수많은 음식들이 있었습니다. 설화는 갖가지 좋은 재료 중에서 나물과 고기를 가지런히 밥 위에 올려 수라상을 만들었습니다. 맛을 본 임금은 이름을 음식의 이름을 물었고 설화는 그 때 암행어사가 지어준 이름을 대었습니다.
맛의 우수함과 영양까지 두루 갖춘 전주비빔밥의 시작은 우연함이었지만 궁중음식으로 사랑받으며 전주의 제일가는 음식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여행은 이런 것이었다. 친구와 도란도란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며 푹 쉬다 돌아가는 국내 여행. ‘레일바이크를 타고 섬진강변을 따라가며 자연을 만끽해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나 홀로 여행이 되고 말았다.
새벽 여섯 시쯤 되었나, 민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왜 벌써 전화했어. 일곱 시에 만나기로 했잖아.”
“우리 쁘띠가, 우리 쁘띠가! 흐윽윽윽!”
쁘띠는 민정이 키우는 개다. 나이가 열 살이 넘었으니 사람으로 치면 노인에 가깝다. 외동인 민정과는 형제처럼 지낸지라 쁘띠에 대한 민정의 사랑이 상당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쁘띠가 호흡곤란이 왔단다. 그래서 민정은 지금 24시간 동물병원에서 대기 중이다. 결국 민정은 여행 출발 한 시간 전, 펑크를 냈다.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열차도 끊고, 숙소도 예매하고, 고대하던 레일바이크도 나를 기다린다. 혼자라고 못 탈쏘냐! 난 결국 혼자만의 여행을 감행했다.
그러나 애초에 시작이 꼬여서 그런 걸까? 벌써 레일바이크에서 발이 묶였다. 이인용이라도 혼자 페달을 밟아 갈 생각이었는데, 혼자서는 탈 수 없단다. 그리고 이건 몰랐던 사실인데, 증기기관차가 레일바이크와 같은 레일을 사용한단다.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운행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칫 잘못하면 열차랑 같이 갈 수 있다고…….
직원들이 혼자 태울 수 없다고 말리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혼자 침곡역에 멀뚱히 앉아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눈에 불을 켜고 나처럼 혼자온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어쨌든 둘이 타기만하면 되는 거 아닌가! 모르는 사람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레일바이크를 타고 싶었다. 그때, 침곡역 구석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저기, 혼자 오셨어요?”
“아, 네.”
“괜찮으시면 저랑 레일바이크 타실래요? 저도 혼자 왔거든요.”
“아, 그런데 어쩌죠. 저도 레일바이크 탈 생각으로 왔는데, 아까 곡성역에서 그만 다리를 삐끗했어요. 오기로 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페달밟는건 무리 같네요. 죄송해요.”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내가 아니었다.
“일단 타세요! 페달을 저 혼자 밟을게요. 보시다시피 저 허벅지 끝내줘요.”
나는 막무가내로 남자의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고 절룩이는 그를 부축하여 레일바이크에 태웠다.
“여기 직원들 앞에서는 다리 안 아픈척 하세요. 잘못하면 또 저지당하니까.”
신호와 함께 꿈에 그리던 레일바이크 체험이 시작됐다.
“여러분! 앞사람과 간격 맞추시고, 뒤처지지 않게 페달 열심히 밟으세요!”
그러나 우리 앞에는 운 없게도 건장한 남자 둘이 타고 있었다. 그들을 태운 레일 바이크는 이미 저 멀리 사라진 후였다.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죄송해요! 한쪽다리로라도 페달 좀 밟아볼게요.”
남자는 미안해했다. 침곡역에서 가정역까지 레일바이크로 사십분 정도 걸린다는데, 십오 분 정도 왔을까? 벌써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분명 섬진강은 아름다웠고. 레일 위를 지나는 기분도 좋았다. 그렇지만 너무 힘들었고, 증기기관차가 언제 돌진할지 모른다는 이상한 공포가 밀려왔다. 아직 레일바이크 타다 증기기관차에 치여 죽었다는 얘기는 못들은 것 같긴 한데……. 도저히 기운이 나질 않았다. 젖 먹던 힘까지도 쥐어짤 수 있는 동기부여가 절실했다.
나는 페달을 밟으며 소리쳤다.
“저기요!”
“네?”
“제가 너무 기운이 없어서 그러는데요! 페달 빨리 밟게 힘 좀 북돋아주실래요?”
“어, 어떻게요? 음악 틀어드릴까요?”
“아뇨!”
남자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 졌다.
“그럼, 제가 불러야 돼요?”
“아뇨! 노래 말고 다른 거요.”
이 말을 할까 말까 할까 말까 하다가 그냥 뱉었다. 아, 내가 죽겠다는데! 우리 두 사람의 목숨이 달려 있잖아!
“가정역 도착하면 저랑 맥주한잔 하실래요?”
내 말을 들은 남자의 얼굴에서 약간의 긴장이 사라졌다. 오호, 싫지는 않은가본데?
“하하. 네, 그래요. 신세도 졌으니 제가 살게요.”
하지만 나의 패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번호도 알려주세요.”
“네? 아, 알겠습니다. 밟으세요.”
아싸! 나는 신이 나서 전력을 다해 페달을 밟았다. 더욱 힘차게 밟았다.
월출산에 올 때부터 이상하긴 했다. ‘달이 떠오르는 산’이라길래 이름마냥 고요하고 아름다울줄 알았는데, 웬걸, 기암절벽에 바위 천지, 산세는 또 어찌나 험한지!
“이 산이 원래 이렇게 험한 거야, 아님 내가 가는 이 코스만 험한 거야?”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검색을 시작했다.
“월출산, 우리나라에서 풍수지리상으로 기세가 가장 센 산? 아, 내가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구만. 게다가 구름다리 코스가 가장 난코스? 아아악, 젠장!”
당장이라도 휴대전화를 던져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따 아내와 통화를 해야 하니까. 싸우고 꼴 보기 싫어도, 집에는 같이 가야한다. 한 집에 사는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꼬일 줄 알았으면 아내와는 같이 안왔을텐데. 그는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처음부터 월출산에 가는 걸 싫어했다. 이왕 여름휴가를 받아 쉴 거면 산 보다는 바다가 좋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가지도 않은 산악 캠핑장에 푹 빠져 있었다. 그의 아내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망할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한민국 남자들을 전부 된장 캠퍼로 만들어 놨어...’
게다가 전국의 술이란 술은 다 먹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인데, 하필 영암에는 그가 아직 섭렵하지 못한 술이 있었다. 그래서 목적지는 두말할 것도 없이 영월이 됐다. 도대체 그냥 막걸리도 아니고, 무화과 막걸리가 뭐길래!
남편의 소원대로, 그들은 월출산 캠핑장에서 무화과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는 생각보다 맛이 좋았다. 처음에는 툴툴거리던 아내도 한 사발, 두 사발 받아먹더니, 혼자 한 동이를 다 비웠다. 그렇게 둘이서 세 동이쯤 먹었을까? 혀가 살짝 꼬인 채 남편이 말했다.
“야, 너는 그렇게 오기 싫어하더니, 이렇게 맛나게 출을 처마시냐? 너 인제 내가 하는 말에 토 달지마 이 여편네야.”
“야, 너 지금 말하는 스타일이 왜 그 모양이야. 너 잊었어? 난 지금도 산이 싫어. 벌레는 왜이리 많고, 저 깎아지른 듯 한 산세는 뭔데? 네가 언제 내가 원하는 대로 말 들어준 적이나 있어? 내가 참아주고 사니까 이게 그걸 당연한 줄 알아. 뭐 그리고 술을 쳐 마셔? 그래, 나 아주 상스럽게 처마시고 있다. 너 때문에 열 받아서 술이 아주 그냥 술술 들어간다. 됐냐?”
사실 남편은 말을 입 밖으로 뱉는 순간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아, 입이 방정이다. 오늘 분위기잡고 첫째 만들려고 했는데, 이거 뭐 분위기고 뭐고, 내일 무사히 집에나 갈 수 있음 다행이게.’
결국 아내는 텐트에서, 그는 해먹에서 잤다. 2세 만들기는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함께 나란히 오르기로 한 월출산을 따로 나섰다. 아내는 바람폭포 쪽으로, 남편은 구름다리 쪽으로.
월출산 캠핑장에서 구름다리까지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그러나 구름다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이 어마어마한 산새는 무엇인가; 한 시간 밖에 안 걸었는데도 다리에서 힘이 풀리고 있었다. 게다가 남들은 고어텍스 옷이며 등산용 스틱이며 만반의 준비를 하며 걷는데, 그의 무기는 달랑 등산화뿐이었다. 걷다가 벌써 생명의 위협을 몇 번이나 느꼈던가! 긴장감에 물을 마구 들이켰더니, 물도 벌써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구름다리는 정말 장관이었다. 밥로스 아저씨가 나이프로 휙휙 휘저어 그린 듯한 바위절벽 사이에 끝도 보이지 않게 긴 다리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공포가 밀려왔다. 한참동안 다리 입구에서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 난간을 꼭 잡은 채 한 발 두 발 걸어갔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경치는커녕 눈을 어디에도 돌릴 수 없었다. 간신히 눈을 돌려 난간을 잡은 자신의 손끝을 바라보다, 그는 깜짝 놀랐다. 난간에는 매직으로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떨어져라.’
그는 꽁지에 모터가 달린 듯 건너편을 향해 걸어갔다. 차원이 다른 공포였다. 산의 기운이 짓누르기 전에 산과 산을 잇는 이 허공에서 도망가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민망할 정도로 빠르게 구름다리 건너편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꺼냈다.
“뚜르르르르... 뚜르르르르... 딸칵. 왜?”
“너 어디야, 바람폭포야?”
“아니, 나 천황봉 거의 다 왔는데? 이제 내려갈 거야. 끊어.”
“야야야야야! 너! 아니, 미안하다.”
“너 왜 그래, 약먹었어?”
아내의 목소리를 듣자 그는 오만생각이 떠올랐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 떠오르는 건 역시 마누라밖에 없구나. 지가 아무리 기가 세고 바가지를 긁는들 그 기운이 월출산만큼 뻗치진 않으니. 적어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진 아니하잖나. 악처라도 처가 있는 게 낫다고, 감사하며 살자.
“아냐. 생각해보니까 그냥 미안해서. 나 인제 구름다리니까 조금만 기다려. 사랑한다.”
“놀고 있네... 빨리와. 투둑. 뚜.뚜.뚜.뚜...”
옛날 옛적에 청도에는 아주 힘이 센 소 두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소들은 항상 서로의 힘을 자랑하려고 다투기 일쑤였죠. 소의 뿔이 맞닿을 때마다 하늘과 땅이 흔들렸습니다. 청도에 사는 동물들과 식물들은 늘 고민이 많았습니다. 다투는 두 마리 소 때문에 하늘과 땅이 흔들리니 식물들은 땅에 뿌리 내릴 수 없었고, 동물들은 제대로 잠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금세 풀들은 시들어 버리고 동물들은 서로를 힐난하고 다투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도 소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힘이 비등하기 때문에 그들의 싸움은 끝이 나지 않았어요. 뿔을 더욱 곤두세워지고 서로를 향해 돌진하는 힘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하늘과 땅은 날이 갈수록 거세게 흔들렸죠.
결국 참다못해 적중산 중턱에 사는 지혜로운 감나무가 나섰습니다. 천년을 살았다는 이 나무는 청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버팀목이었습니다. 아무리 힘이 센 황소들이라지만 감나무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죠. 감나무는 소들을 적중산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러고는 너희들 중에 저 하늘의 별을 떨어뜨린다면 자신이 아끼는 감 하나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대신에 별을 떨어뜨리기 전에는 둘이서 싸우면 안 된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소들은 입맛을 다셨습니다. 감나무가 품은 감을 먹으면 힘이 더욱 세어지고 온몸에서는 아름다운 색동빛을 뿜게 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죠. 또한 청도 감나무의 감은 반시라고 불리며, 그 육질이 굉장히 연하고 너무나 달콤해 한번 맛보면 그 맛을 잊을 수 없었거든요.
그때부터 두 마리의 소는 서로가 아닌 하늘의 별을 떨어뜨리기 위해 열심히 하늘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떨어뜨리려고 해도 별들에게 그들의 뿔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처음으로 다투지 않고 머리를 맞댄 채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답답했던 황소 한 마리가 산을 향해 뿔을 내다박았습니다. 그러자 뿔이 조금 부스러지더니 반짝이는 빛으로 흩어졌습니다. 밤에 흩날리는 빛은 마치 별들처럼 보였습니다. 어리석은 소는 그게 별인줄 알았습니다. 소는 감나무에게 찾아가서 자신이 만든 빛을 보여줬습니다. 그러자 감나무는 감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산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들의 뿔은 조금씩 닳기 시작했고,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별로 보였습니다. 별을 가져올 때마다 감나무는 감을 하나씩 주었습니다. 소들은 자신들의 뿔이 부스러지고 있다는 걸 조금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저 별을 만들어 달콤한 반시를 먹어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습니다. 황소들의 뿔이 점점 닳자 하늘과 땅을 흔드는 소리도 점점 작아졌습니다. 그리고 적중산에는 커다란 구멍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적중산 중턱에는 아주 커다란 구멍이 뚫려버렸습니다. 그러자 소들은 서로의 뿔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그들의 뿔은 점점 더 빨리 닳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날렵하게 크던 뿔은 아주 작아 흔적만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소들이 아무리 세게 부딪혀도 하늘과 땅이 울리지 않았어요. 청도는 평화로워졌습니다. 하지만 소들은 멈추지 않고 별을 만들기 위해 서로의 뿔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소들은 어떻게 되었냐고요? 지금도 소들은 별을 만들기 위해 서로의 뿔을 맞대고 있답니다. 사람들은 소들이 만들던 별들을 기리기 위해 빛 축제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에 걸을 때마다 부스럭한 소리가 귓가를 맴돈다. 제법 쌀쌀한 바람에 소매사이로 찬바람이 새어 들어온다. 겨울이 왔나보다.
궁을 떠나온 지 닷새가 훌쩍 지났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누구보다 조정과 임금을 생각하며 성실히 정치를 펼쳤다. 누구보다 학식이 뛰어났고 어진 성품으로 임금을 잘 보필하던 그였다.
하지만 어찌 정치를 하는 사람들과 궁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와 같은 마음일까. 궁의 세력들에 밀려 크게 화를 입은 그는 잠시 영주에 내려와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가느다란 눈발이 잠시 내려앉았다 사라졌다. 겨울이 왔다.
긴긴 겨울을 어찌 보내랴. 이제 겨울의 시작인 것을. 언제 봄이 오려나.
선비는 긴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임금을 걱정했다. 그리고 임금과 함께 정사를 논의하고 싶었다. 하루도 한양이 그리워 발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자리에 들었다.
선비는 조용히 종이를 펼치고 먹을 갈아 붓을 들었다. 옛날 선비의 할아버지가 종종 흰 종이에 매화를 그리셨던 것을 떠올렸다. 선비도 고고하고 기품 있는 매화나무를 그렸다. 그리고는 한 송이 한 송이마다 정성을 들였다.
달빛을 받아 더욱 아름다운 매화나무.
매화꽃 한 송이가 피어나면 그 다음날 또 한 송이.
그렇게 피어난 매화는 하얗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수줍은 미소를 건네네.
겨울이 가면 봄은 더욱 가까워오리. 멀지 않은 곳에 봄은 오고 있네.
선비는 그렇게 정성스럽게 꽃 한 송이씩 여든 한 송이의 하얀 매화를 그렸다. 하얀 매화는 긴긴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선비는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매화나무를 창문에 붙이고 하루 한 송이씩 붉은 색으로 물들였다. 그렇게 여든 한 송이가 다 물들 때면 봄이 오리라 믿었다.
매일 하루를 마무리 할 때면 노랗게 빛나는 달을 바라보며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하여 경건하게 절을 올린 뒤 매화 꽃송이에 붉은 색을 입혔다. 선비는 떳떳하고 흔들림 없는 지조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다. 내일이면 동지로 부터 여든 한 번째 날이 되는 날이다. 창문에 붙여놓은 매화나무에도 한 송이의 흰 매화가 없이 모두 붉은 빛을 내는 아름다운 매화나무가 완성될 것이다.
드디어 여든 한 번째의 날이 되었다. 선비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았다. 정말 마당 앞에 매화나무에도 이처럼 꽃망울을 틔운 꽃들이 반겨줄까 긴장되었다.
문을 열어보니 정말로 봄을 알리는 매화가 피어있었다. 선비는 환하게 웃었다. 길고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찬바람 사이로 붉은 매화가 꽃잎을 흔들었다. 그때였다. 한양에서 온 전갈이라며 다시 한양으로 올라와 정사를 함께 돌보라는 왕의 명이 담겨있었다. 끝까지 의리와 지조를 버리지 않고 봄을 기다린 선비에게 정말로 봄이 찾아왔다.
선비는 감사함에 절을 올리며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겨울이 오면 머지않아 봄은 다시 올 것이다. 그렇게 다시 봄이 오리라.
괜찮아.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말이었다. 말. 단지 말뿐이었다. 조금 느린 것뿐이라고 괜찮다고.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고 느낀 건 아이가 다섯 살 무렵이었다. 아이는 자동차, 인형, 기차 등 많은 장난감들 사이에서도 말 모양 인형을 가장 아꼈다. 럭키라는 이름도 지어주며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항상 럭키와 함께했다. 아이가 말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다고 생각했지 그것이 자폐아이의 보편적인 특징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 아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나도 남편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아이에게서 말 인형을 빼앗아 숨긴 적도 있었다. 말 인형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아이들처럼 한 곳에 집착하지 않고 차츰차츰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싶어서였다. 점점 아이의 불안증세가 깊어지고 말 인형을 찾아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니는 통에 결국 두 손을 든 것은 나였다.
아이에게 말이 그렇게 좋으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이 아니라 럭키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동물이 말이잖아라고 타일러봐도 아이는 고집 있는 말투로 말이 아니라 럭키라고 했다. 결국 또 그래, 럭키. 라고 대답을 한 나다.
아이가 말을 좋아하니 남편은 이제 아이의 상태를 받아들이자고 말했다. 그리고는 주말에 아이가 좋아하는 말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아이가 뛸 듯이 좋아할 것을 생각하니 엷은 웃음이 지어졌다. 분명 많은 말들을 보고 다 럭키라고 부르겠지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지금 10살이다. 태어나서 살아있는 말을 처음 보아서일까 아니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럭키를 닮은 것들이 하나도 아니고 여러 마리가 눈앞에 펼쳐져서 신기해서일까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계속 감탄사만 연발하였다. 남편은 다정하게 아이의 손을 잡고 말을 쓰다듬어보기도 하고 말과 교감을 나누는 법을 알려주었다. 아이도 무서워하지 않고 말과 교감을 나누었다.
“아들, 여기는 말 정말 많다. 그치? 말 어때? 다 럭키처럼 보여?”
“아니. 난 이 말이 가장 마음에 들어요. 이 아이만 럭키라고 불러줄거야.”
아이는 뜻밖에도 말 한 마리를 콕 집어 말했다. 말이라면 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유난히 마음에 든 말이 있는 모양이다.
아이가 어떤 결정이나 선택을 한 것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지나온 순간에는 그저 엄마인 내가 이건 좋지? 이건 별로다 안 그래? 이런 식으로 아이의 선택을 나 스스로 해왔다. 그것이 아이의 결정인양. 아이의 선택이나 생각은 뒷전이었다. 알면서도 아이의 상태를 내세워 그렇게 살아온 것이 미안해졌다. 충분히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아이였는데 말이다.
날이 어두워졌다. 이제 그만 진짜 말인 럭키와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할 때였다. 아이도 헤어짐을 아는지 더 있겠다는 떼를 쓰지 않고 말과 인사를 나누었다. 잘 있으라며 또 보러 오겠다고했다. 작은 손바닥위에 각설탕을 올려놓고 말이 먹을 수 있도록 손을 뻗어주었다.
마사에서 나와 아이를 데리고 별을 관측할 수 있는 천문대로 향했다. 아이에게 천천히 우리가 별을 보러 오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아이는 반짝반짝이라고 대답했다.
그래 반짝반짝.
요즘처럼 선선한 가을에 보이는 별자리는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을 들은 후 무엇이 보이냐고 물어보았다. 아이가 말이 보인다고 했다. 말? 아이의 머릿속에는 온통 말로 가득한 것 같았다.
“아! 페가수스자리를 본 모양이구나?”
페가수스자리가 말 모양을 했다고 해도 저렇게 큰 하늘을 수놓는 별자리로 말을 떠올리긴 힘들 텐데.
“우리아들 대단하네.”
아이에게 참 오랜만에 대단하다고 칭찬을 한 것 같다. 아이는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