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힐링이라는 단어로 억지스러운 여유를 만들고 자신의 행복함을 시간에 끼어 맞추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것도 다 만들어진 여유이고 행복인데 말이다. 그렇게라도 삶의 즐거움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나쁘지 않은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숨이 약간 가빠지려고 하자 수려한 자태의 산사가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인지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과연 이곳에서 내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을지 고민이 들었다.
그때 늙은 스님이 합장을 하며 걸어오셨다.
“사람이 많아 당황하셨나봅니다.”
“네, 스님. 이곳이 꽤 유명한 절인가봅니다. 사람이 많은 걸 보니.”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쉼을 얻어 가면 좋지요. 혹 템플스테이를 하러 오신 거라면 저를 따라오세요.”
서른이 넘은 나이에 중, 고등학생들과 템플스테이를 하게 될까 싶었는데 생각보다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이곳을 찾은 듯 했다. 위엄 있는 자태의 대웅전을 지나 작고 아담한 방 하나를 배정받았다. 그곳에 짐을 풀고 일박 이일동안 지낼 옷을 건네받았다. 옷을 갈아입고 마루에 걸터앉아 숨을 크게 들이마셔보았다. ‘공기는 좋네.’라고 생각하던 차에 비로전 앞에 한 여인이 서성이는 모습이 눈에 들었다. 나이도 꽤나 비슷해 보이는데 무엇 때문에 계속 한 곳에 머무르는 것일까 생각했다. 가까이 가볼까 생각하다가 괜히 방해하는 건 아닌가 싶어 마음을 접었다.
가볍게 저녁 발우공양을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이 생겼다. 산책 겸 낮에 미처 돌아보지 못한 곳을 다녀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살펴보는데 낮에 비로전에서 보았던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조용한 걸음으로 비로전 앞을 서성였다. 날이 어스름해져서 일까 그녀에게 궁금증이 생겼고 말을 걸어보고싶은 충동이 생겼다.
“저기. 낮부터 쭉 여기에 서계시던데.”
여자는 낯선 사람이 낮부터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여겨서일까 꽤나 경계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네, 템플스테이 하러 왔어요.”
“아, 그러시구나. 저도 템플스테이 하러왔는데. 오늘 오신 거예요?”
여자도 템플스테이를 하러 왔다고 했다. 나이도 비슷하고 이곳에 온 목적도 비슷하다고 여긴 나는 여자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조금 더 생긋 웃어보였다.
“네, 오늘요.”
여자의 대답은 그래도 단답이었다. 여자의 눈빛에서 무언가 쓸쓸함이 묻어보였다. 말하기 힘든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여긴 나는 여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저랑 나이도 엇비슷해 보이시는데, 저는 서른둘이에요. 아직 미혼이고요. 사실 다니던 직장 그만두고 힐링좀 해볼까 하고 들어왔는데 공기도 좋고 뭐, 종교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편안해 지는 것 같아요.”
여자는 무심한척했지만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이 여자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지 않을까 생각했다.
말없이 내 말만 듣던 그녀가 조용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저랑 나이가 같네요. 저도 서른둘이에요. 전 결혼을 했는데, 결혼 한지 꼬박 2년이 지났는데 아이가 안 생겨서요. 여기 비로전에서 발가벗은 동자를 발견하면 사내아이를 가질 수 있다지 뭐예요. 그래서 오늘 낮부터 계속 여기만 서성이게 되네요.”
뜻밖이었다. 여자도 템플스테이에 온 것이라기에 별다른 고민 없이 그저 잠시 쉼을 얻고자 이곳을 찾은 줄 알았다. 그런데 여자는 꽤나 속 깊은 이야기를 꺼냈다.
“그랬군요. 그래서 벌거벗은 동자는 찾았어요?”
“아니요, 잘 안보이네요. 아이와 연이 닿지 않나봐요.”
“그럼 눈을 감고 찾아보세요. 눈을 감고 눈앞에 동자승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이를 가득 품어보세요, 그럼 누가 알아요? 떡하니 아이가 들어설지.
미안해요. 달리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네요. 그래도 전 여기 다 비우러 들어온 것 같은데 어느새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을 해보니까 마음속에 뭔가 가득 들어차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걸 말해주고 싶었어요.”
여자는 엷은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만들어주려고 조용한 걸음으로 그녀의 곁을 떠나왔다.
비움과 채움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 정반대인 것도 아닌 것 같았다.
3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대학 졸업반 시절 떠난 봉사활동에서였다. 나는 보육원에서 어린 아이들을 돌보며 꽃밭에서 아이들에게 꽃반지를 만들어 주는데 멀리서 날아온 공이 내 앞에 떨어졌다. “Sorry.” 라고 짧은 말을 남긴 채 공을 가지고 휙 달아났다. 벤치에 앉아 공을 들고 간 쪽을 바라보니 남자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며 놀아주고 있었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보육원 아이들은 일제히 식판을 들고 배식을 기다렸다. 아이들에게 점심을 먹이고 아이들 낮잠시간이 되니 한숨 돌릴 시간이 났다.
아이들의 장난감을 치우고 빨랫줄에 빨래를 거는데 큰 이불 같은 건 영 쉽지 않았다. 그런데 웬 키 큰 남자가 불쑥 내 앞에 서서 빨래를 걸어주었다. 자세히 보니 아까 축구공을 가지고 간 그 외국인이다.
“때, 땡큐.”
“뭘요.”
“어! 한국말 할 줄 알아요?”
“그럼요. 한국말 조금 할 줄 알아요. 나는 메브에요. 프랑스에서 왔어요. 당신은요?”
“아. 저는 은영이에요.”
빨래를 다 널고 우리는 벤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이곳에 봉사활동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한국은 관심 많아요. 우리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이에요. 그리고 여기는. 음. 봉사 좋으니까.”
“그렇군요.”
서툴게 한국말을 하는 메브를 보니 절로 웃음이 났다. 약간은 귀엽다고 할까. 왠지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프랑스 우리 동네에 서울공원 있어요. 나는 가보았습니다. 서울에도 파리공원 있어요.”
“프랑스에 서울공원이요?”
강남역 사거리에 서울시와 이란의 수도 테헤란시가 자매결연을 맺은 기념으로 길 이름을 붙인 것은 알았지만 프랑스와도 이렇게 공원을 지어 외교적인 문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쩐지 부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프랑스 서울공원 멋져요.”
메브는 휴대전화에서 서울공원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주었다. 한국적인 고전미가 넘치는 정자에 불로문까지. 사진 속 메브는 귀여운 모습이었다.
“멋지네요. 파리공원에도 가 보았나요?”
“아직 못 가봤어요. 내일 가볼거에요. 같이 갈래요?”
그렇게 갑작스런 인연은 하루 더 함께 하게 되었다.
검정색 모자에 빨간색 운동화를 신은 메브는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메브와 파리공원을 둘러보니 정말 파리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파리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은 작은 모형의 에펠탑과 개선문 정도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나 에펠탑 정말 보고 싶었는데, 언젠가 파리에 가면 꼭 보고 말거야.”
“이거보다 조금, 조금 더 크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농담 아니야 메브. 난 파리에 꼭 가보고 싶어. 에펠탑도 보고 여기 있는 개선문도 보고.”
“언제 놀러와. 우리나라에 은영 초대할게.”
“그래, 고마워.”
“나는 말이야 메브. 꼭 프러포즈는 에펠탑 아래에서 받고 싶어. 그게 내 로망이랄까?”
웬일인지 메브 앞에서 뜻밖의 이야기까지 꺼내는 내가 놀라웠다. 그저 프랑스라는 나라와 파리라는 도시에 연계가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정도로 메브와 가까워 졌다고 느껴졌을까.
“꼭 와. 내가 불 반짝 하고 있을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프랑스 사람과 그 프랑스 앞에 서 있는 한국 사람이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한발자국 더.
차마 그리움을 말로 다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의례적으로 어떤 장소를 찾아가곤 한다. 그곳에서 보고 싶은 사람의 흔적을 더듬어보기도 하고 음성을 떠올리며 추억의 끝을 걸어보곤 한다. 항상 후회는 무언가 지나고 난 후에 스며드는 것이라 했던가. 준서는 문득 부모님을 만나러 그곳에 간다.
그곳은 늘 조용했다. 먼발치에서 동그랗고 작은 무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약간 허무하기도 했다. 두 분이 나란히 사이좋게 누워계시는 곳이지만 준서의 눈에는 잔디가 무성한 작은 언덕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맨손으로 무덤가에 자란 잡초를 몇 개 뜯으며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저 왔어요. 저 준서 왔어요.”
혼자서 이야기 하는 것이 어색한 것인지 듣는 사람이 눈앞에 보이지 않아서인지 준서는 퍽 어색해했다. 마치 연극무대에서 독백을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준서는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 부모님과 제법 자주 마찰을 빚었다. 그래서일까 준서는 꽤 긴 방황을 했고 준서의 부모님도 많이 지쳐있었다. 외아들이라 오냐오냐 곱게만 자랐을 것 같다는 다른 사람의 시선과는 다르게 준서의 부모님은 꽤 엄하셨다. 교수였던 아버지는 아들의 방황이나 조금의 일탈도 용납하지 않으셨고 그럴수록 준서는 더 엇나가기만 했다.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과 어머니의 방관은 준서를 더욱 힘들게 했다.
준서는 차라리 이럴 거면 부모님이 없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품었다는 것이 몇 년 후 뼈저리게 아픈 말로 남을 줄은 준서도 몰랐을 것이다.
종이컵에 소주를 조금 따르고 절을 올렸다.
“저 곧 결혼해요. 듣고 계시죠? 좋은 사람이에요. 저한테도 잘해주고 마음도 넓어요. 저 이런 유별난 성격 다 받아주는 사람이면 어머니 아버지도 이 여자 인정해주실 거라 믿어요. 부모님 없이 결혼한다고 생각하니까 문득 서글퍼져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렇게 여기 누워계시니까 정말이지 그 때는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결혼을 하고 아이도 태어나면 부모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전 아버지처럼은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늘 어머니를 외롭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옆에 나란히 누워 손 잡아주고 계시죠?”
준서는 부모님이 가지런히 누워계신 이곳을 자주 찾지 않았었다. 옛날에는 삼년상이라고 해서 부모가 돌아가신 후 3년 동안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에 대한 효를 다하고자 여막에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고 호랑이한테 잡혀가서도 묘성을 쌓기 전까지 죽을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하였다던데 준서는 어쩐지 이곳이 낯설었다.
이렇게 부모님께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는 것도 새삼 놀라울 일이었다.
곧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될 준비를 해서일까 준서는 새삼 부모님의 곁이 그리웠다. 호통을 쳐도 쓴 소리를 해도 좋으니 곁에만 함께 있어주기를 바랐다.
산소에 오기 전 준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올리는 편지를 썼다. 어버이날에도 써보지 않았던 서툰 편지로 준서는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산소 앞에 조심히 편지를 놓아두었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 편지였지만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진실 된 편지였다.
편지를 놓아두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왠지 부모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온 기분이었다. 그리고 낯설 것만 같았던 이 길이 낯설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이곳을 찾고 부모님을 뵐 때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다섯 살 때 무렵이다. 나는 동네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다. 무서움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차마 ‘엄마’를 목 놓아 부르지도 못했다. 그저 나중에서야 엄마를 보고 난 뒤 안도감에 참았던 설움과 공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릴 뿐이었다. 엄마는 내 엉덩이를 팡팡 때리면서 엄마도 놀람과 안도감을 내려 보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아직 사그라지지 않는 두려움 때문에 눈물을 찔끔찔끔 흘렸다. 그럴 때면 엄마는 집으로 돌아와 싱싱한 딸기를 생크림에 듬뿍 찍어 주셨다. 그럼 언제 그랬냐는 듯 씩씩하게 눈물을 훔치고 딸기 한 접시를 뚝딱하고 비웠다.
어려서의 기억이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담겨있어서 일까, 나는 여전히 마음에 두려움이 가득 찰 때면 딸기를 먹었다. 수능시험을 칠 때. 처음 남자친구와 첫 키스를 하던 날.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면접을 볼 때. 나는 마음속으로 딸기를 되뇌었다. 그럴 때면 자연스레 입안에 침이 고였다.
서울에서 자취를 하던 나는 주말이 되어서야 집에 내려갔다. 자취 생활이 어느덧 몸에 익숙해지자 주말에만 가던 것도 줄어들어 한 달에 한번 혹은 두 달에 한번 꼴로 집에 내려갔다. 엄마가 항상 전화로 안부를 물으며 집에 내려올 것을 당부했지만 알겠다고 한 뒤 당일 일이 생겨서 못 간다는 식으로 한 달 그리도 두 달을 보냈다. 내가 집으로 곧장 달려간 것은 아빠의 전화를 받은 후였다.
‘네 엄마 지금 쓰러졌어. 여기 병원이야. 얼른 집으로 내려와.’ 내가 아무리 집에 소홀하고 엄마에게 소홀했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냐며 꿈속을 헤매고 있는 엄마의 몸을 마구 흔들었다. 간호사는 환자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며 나와 엄마를 분리시켰고 나는 마구잡이로 엄마를 흔들어댔다. 결국 면회시간도 다 못 채우고 병실 밖으로 쫓겨났다. 담당 의사는 엄마가 지금 혼수상태라고 했다. 언제 정신이 돌아올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혼수상태라고 하면 한 달 혹은 일 년 그것도 아니면 기약할 수 없는 언젠가를 바라면서 잠들어있는 상태가 아닌가. 어떻게 이런 일이.
병원 복도 끝에 그만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다. 머리를 큰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엄마가 왜? 아니. 나에게 왜 이런 일이.
간호사에게 사정사정하여 잠깐 동안 얼굴만 보고 나오겠다고 빌었다. 간호사는 안 된다고 말했으나 그녀도 사람인지라 아주 잠깐동안만이라는 전제하에 허락을 해주었다.
“엄마. 내 말 들리지? 엄마 지금 자고 있는 거니까 내 말 다 알아 듣고 있는 거지? 엄마 그 동안 많이 힘들었어? 왜 이렇게 갑자기 쉬고 싶어진 거야? 응? 엄마, 한숨 푹 자고 나면 이제 지겨워서라도 일어날 거지? 일어나서 나랑 같이 쇼핑도 하고 요리도 하고……. 그래! 엄마랑 내가 좋아하는 딸기 생크림에 듬뿍 찍어 먹어야지. 응?”
엄마, 제발 눈 좀 떠봐, 내말 안 들려?
엄마가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된지도 벌써 한 해가 흘렀다. 주위에서는 이제 그만 엄마를 보내주는 것이 어떠냐는 말이 귀에 잠잠히 들려왔지만 나는 믿는다. 그저 엄마는 꿈속에서 너무 좋은 일들이 많아서 아직 깨고 싶지 않은 걸 거라고. 내게 줄 딸기를 모조리 따오느라 늦는 걸 거라고.
병실에 들어서기 전 마음속으로 기도를 한다. 엄마 손이 아직 따뜻하잖아. 그걸로 된 거 아니야? 아주 조용히 엄마에게 집중하면 엄마가 가끔 코를 고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니 나는 아직 엄마를 보낼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열매가 익을 무렵이 아니라는 것에 희망을 건다. 엄마는 딸기가 빨갛게 열매를 맺을 때면 분명 눈을 뜨실 것이다. 그리고는 울고 있는 나를 달래려 따뜻한 생크림을 듬뿍 찍은 딸기를 건네며 ‘많이 무서웠지? 이제 괜찮아.’라며 그동안의 설움을 다독여 줄 것이다.
후회라는 것은 언제나 지나고 난 다음에야 든다. 내가 그렇고 다른 사람이 그렇듯 언제나 동일하게.
“따님이 어머님을 많이 닮았어요.”
미용사가 엄마의 머리를 빗으로 다듬으면서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어쩌면 지금껏 엄마를 봐온 나보다 엄마를 처음 본 미용사가 더욱 살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는 참 오랜만에 미용실을 찾았다.
“우선 희끗한 저 흰머리 좀 염색해주시고 머리는 가볍게 파마해주세요.”
엄마는 온순한 양처럼 가만히 앉아있다. 바로 앞에 마주하고 있는 큰 거울이 어색해서 인지 자꾸만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엄마, 고개 좀 들어봐. 그래야 머리가 예쁘게 되고 있는지 알지.”
내 말에 그제야 고개를 살짝 들어 거울을 본다. 여전히 어색한 표정은 남아있지만 그런 어색함이 낯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따님이랑 이렇게 시내 나오시니 좋으시죠?”
“네”
엄마의 단답형 대답에도 미용사는 여전히 수다스럽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아무래도 직업병이 아닌가 싶었다.
“점심은 맛있는 거 드셨어요? 따님한테 오늘은 맛있는 거 사달라고 하세요. 예를 들면 스파게티라던지 경양식도 좋고요.”
“네”
미용사는 친절히 메뉴까지 들어주었지만 여전히 엄마는 무뚝뚝했다. 미용사도 조금은 지쳤는지 머리손질에 신경을 두었다. 두어 시간 지나자 엄마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희끗했던 흰머리는 단정한 자연갈색으로 물들었고 헝클어져있던 머리칼은 가벼운 펌으로 탄력이 생겼다.
“이야. 누구 엄마인지 정말 예쁜데?”
엄마는 피식 웃었다. 엄마도 마음에 드신 듯 웃음을 보이셨다.
엄마는 얼마 전 자궁근종 수술을 받았다. 암은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자궁을 들어낸다는 것에 엄마는 여자로서의 삶이 끝난 것처럼 많이 우울해 하셨다. 수술은 잘 되었고 건강관리만 잘 하시면 일상생활에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 했다.
“엄마,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한동안 죽만 먹어서 좀 질렸을 텐데. 엄마가 좋아하는~”
순간 엄마가 좋아하는 하고 말문이 막혔다.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엄마는 내가 자취집에서 집에 가는 날이면 우리 딸 좋아하는 순두부다 갈비찜이다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놓고 계셨는데 나는 이렇게 많은 식당이 있음에도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 하나가 떠오르지 않아 엄마 손을 잡고 계속 걷기만 하고 있다.
“칼국수 먹자. 칼칼하고 시원한 게 먹고 싶네.”
엄마는 내가 당황한 것을 알아챘는지 칼국수를 드시고 싶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입맛이 없다고 하는 날이면 국수를 말아 드셨던 기억이 났다.
등촌동 칼국수는 뽀얀 국물에 바지락이 들어가 있는 모양이 아니었다. 버섯 매운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얼큰한 국물에 버섯과 미나리 그리고 칼국수 면을 넣어 칼칼하게 먹는 방식이었다. 한여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먹다보면 땀이 나면서 몸에 원기가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음, 국물 시원하다. 엄마 여기 와 본적 있어?”
“응, 저번에 네 아빠랑. 국물이 칼칼하고 시원한 게 좋더라고.”
“아빠랑? 언제?”
“엄마 수술하기 전에. 여기에서 답답하던 속 다 풀고 가라고.”
무뚝뚝하던 아빠는 수술 전에 엄마를 모시고 나온 적이 있으셨나보다. 엄마의 갑작스런 수술에 아빠도 적잖이 걱정이 되셨던 모양이다. 평소 말 한마디 선물 하나 제대로 해본 적 없으셨던 아빠가 먼저 외식을 하자고 했다는 것에 엄마도 아빠의 마음을 조금은 느끼셨으리라 생각한다.
국수를 다 건져먹고 갖은 채소와 계란까지 풀어 볶음밥까지 싹 비우고 나서 음식점을 나왔다.
나는 엄마에게 뭐 해보고 싶은 것이 없는지 물었다. 엄마는 내손이랑 엄마손을 비교해보더니 “나도 이런 거 해보고 싶다. 이걸 뭐라 하더라? 네일아트?” 엄마는 생각도 못한 네일아트를 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 엄마. 이제 엄마 해보고 싶은 거 다 하면서 그렇게 사세요.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엄마와 걸어가는 데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에헴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마을의 꼬마들이 빙 둘러앉았습니다. 올해 102세로 마을의 가장 장수하신 에헴 할아버지는 늘 아이들을 보면 에헴! 하고 헛기침을 하시는 할아버지라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부를 때 에헴 할아버지라고 부르곤 하지요. 오늘은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약수터 정자에서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실 모양입니다.
아이들은 이야기가 궁금하여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하고 몸을 할아버지 쪽으로 바짝 당겨 앉았습니다.
“에헴! 여기 약수터 보이지? 오늘은 이 약수터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이 약수터는 아주 오래되었지. 아마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 일게다. 이 약수는 지금보다 더 신비로운 물이었지. 바로 아무리 많은 사람이 마셔도 그 물이 마르지 않았단다. 그리고 이 물은 톡 쏘는 맛과 신비로운 효능이 있어 배가 아프고 몸이 아픈 환자가 먹으면 힘이 솟으며 병이 낫는다고 알려졌었지. 그래서 우리 마을로 이 약수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해가 뉘엿뉘엿 질 때였지. 수상한 차림의 남자가 큰 배낭을 메고 우리 마을로 들어왔어. 그리고는 큰 통에 물을 마구잡이로 퍼 날랐지. 이 특별한 약수를 빼돌리려고 했던 모양이야. 그렇게 많은 물을 퍼 나른 남자가 다녀가자 아무리 마셔도 마르지 않던 약수터의 약수는 점점 말라가게 되었어. 물이 점점 말라가는 것을 안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더 많은 물을 차지하려고 싸우기 시작했단다.
그렇게 사이가 좋던 마을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고 거짓말을 하고 심할 때는 물을 빼앗기도 하였지. 쯧쯧쯧”“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에헴. 끝까지 들어 보아라. 그렇게 약수 때문에 싸움이 계속되자 보다 못한 마을의 산신령이 물의 맛과 효능을 싹 없애버렸단다. 그래서 아무리 물을 먹어도 병이 낫는 사람도 없고 물도 점점 흘러나오지 않았지. 사람들은 또다시 이게 다 다른 사람들의 욕심 때문이라고 하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생각을 하지 않았단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의 터줏대감으로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한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마을에 퍼지게 되었어. 사람들은 그제야 약수 때문에 싸운 것을 후회하고 반성했지. 그러면서 자신이 예전에 받아두고 얼마 남지 않은 약수를 한 바가지씩 할아버지네 집으로 가져왔어.
그렇게 한 바가지씩 모은 약수를 가지고 몸에 좋은 토종닭을 잡아 닭백숙을 푹 고아 할아버지께 드렸지. 그러자 할아버지의 병은 씻은 듯이 낫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은 할아버지가 건강해지셔서 매우 기뻐했단다. 할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한 바가지씩 약수를 모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기특하게 여긴 산신령을 달기약수터의 효능을 다시 되살리고 그 옆에 또 다른 약수터를 만들어 많은 사람이 물을 마시고 건강해지기를 바랐단다.”
에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아이들은 한 명씩 약수를 마셔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너나 할 것 없이 팔을 들어 힘이 불끈불끈 솟는다고 하였지요.
아이들은 에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물을 마시니 마을의 약수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났지요. 그런데 이야기 속 닭백숙을 먹고 건강을 되찾은 할아버지가 에헴 할아버지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른 채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야, 서울은 역시 죽이네. 사람들 때깔부터가 다르다. 우리 동네랑은 비교도 안 된다.”
서울로 갓 상경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느끼는 서울의 첫인상은 그랬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쁜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고 고층 건물들은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아찔한 높이를 자랑했다. 고층 건물 하나를 가리키며 저기를 올라가려면 며칠 전에 올라가야 하나? 라는 촌티 팍팍 나는 생각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 당시에는 엘리베이터라는 것이 생소할 시기였으니 그럴 만도했다.
내가 서울이라는 곳 그것도 영등포구라는 이 네 글자를 기억하는 건 단 하나였다. 다름 아닌 ‘라디오’ 그때의 청춘이라면 누구나 문세오빠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었을 것이다. 나 역시 매일 같은 시간이면 지지직거리며 주파수를 잡았고 스탠딩 불빛 하나만 켜놓은채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매일 밤 10시 5분부터 밤 12시까지 문세오빠의 달콤한 목소리와 각각의 사연들 그리고 언제 나올지 모르는 신청곡을 기다리는 재미는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가사를 받아 적느라 팔이 아프도록 글씨를 끼적인 적도 있고 문세오빠가 읽어주는 사연에 눈물콧물을 쏟기도 했다.
라디오는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런데 항상 라디오에 신청곡이나 사연을 보내라며 말하던 곳이 영등포구 여의도동 사서함…… 이렇게 시작했다. 지방에 사는 나로서는 서울 하면 내가 늘 들어오던 영등포구 여의도동밖에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그렇게 내게 영등포구 여의도동은 언젠가 꼭 가보고 싶은 그런 공간이었다.
그렇게 올라온 서울은 역시나 특별했다. 사실 정신없는 도로와 사람들 때문에 별 다를 것 없는 공간이 더욱 특별해 보인 것일 수도 있다.
“야야! 저 봐라. 저기 진짜 높은 건물 있다. 저게 다 몇 층일까?”
“야, 니 저거 모르나? 63빌딩!! 63빌딩이니까 63층이지.”
“니는 어떻게 알았는데? 그나저나 63층? 이야. 저기 올라가면 서울 시내 다 보이겠다. 그렇지?”
“올라가볼래? 여기까지 왔는데 63빌딩도 안 올라가보면 사람들이 욕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긴 시간을 보낸 채 도착한 곳은 63빌딩의 전망대였다. 서울 시내가 한 눈에 들어왔다. 꿈에 그리던 서울 길. 그리고 그 속에 속해있는 나 자신이 신기한 순간이었다. 서울이라는 단어가 마치 다른 나라 같은 느낌이었는데, 내심 뿌듯해지는 순간이었다.
“야! 저기 저 방송국! 저기에서 문세오빠 라디오 하잖아. 저기서 한참 있다 보면 오빠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바보야, 지금 아직 오후 4시도 안됐는데 무슨, 오빠 라디오 밤에 하는 거 몰라?”
“아, 그렇지. 그럼 우리 오늘 우리 여기 왔었다고 라디오에 사연 보내볼까? 그럼 당첨돼서 문세오빠가 우리 이름도 불러줄걸?”
63빌딩에서 내려와 한참을 문방구를 찾아 헤맸다. 우리 동네는 그냥 마을 어귀에 자그마한 문방구가 하나쯤은 있었는데 여기는 그 흔한 문방구도 잘 보이지 않았다. 무슨 서울이 문방구 하나 없나 하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문방구를 물어보니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에 도착하니 문구와 여자아들이 좋아할 만한 머리핀, 작은 장난감까지 함께 팔고 있었다. 눈이 휘둥그레져 한참을 구경하다 예쁜 엽서 하나를 골라왔다.
투. 문세오빠.
안녕하세요? 문세오빠. 이렇게 시작한 글에 우리는 참 손글씨로 어여쁘게 엽서를 꾸몄다. 긴장감에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 글이 영등포구 여의도동으로 드디어 실려 가는 구나 생각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는 두 손을 모아 엽서를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었다. 언제 방송이 될지도 모른 채 혹여 채택이 안 되면 어쩌나 노심초사 걱정도 되었다.
앗, 10시다! 별이 빛나는 밤에 할 시간이야.
별이 빛나는 밤에. 문세오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굴에 꽃받침을 하고 이불속에 쏙 들어가 라디오를 한 참 듣는데 익숙한 이름과 글귀가 흘러나왔다.
투 문세오빠.
안녕하세요? 문세오빠.
그렇게 우리가 보낸 사연이 채택되어 라디오를 타고 흘렀다.
처음 영등포구를 찾던 날, 63빌딩에 올라가 서울 시내를 본 것, 라디오에 사연을 쓰게 된 이야기까지 라디오는 참 신기하게 우리의 이야기를 타고 흘렀다.
라디오에 온 감성을 쏟았고 학창시절이 라디오로 가득 차 있던 시기. 그 속에는 가 본적이 있어도 가보고 싶은 영등포구 여의도동이 있다.
오늘은 어떤 사연이 이 주소로 흐르게 될까.
팔이 아파 펜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을 하면 딱 떠오르는 건 높고 맑은 가을 하늘인데, 왠지 며칠 째 날씨가 우중충했다. 그래도 바람에 단풍잎 한 장이 날려 오는 것을 보니 가을은 가을이다.
이직을 앞두고 몇 달 간, 일을 쉬게 된 나는 이 며칠 동안 편지를 썼다. 마치 동물원의 오래 된 노래처럼, 그리고 동물원의 노래를 들으면서 말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바로 취업을 해서 쉴 새 없이 일만 한 지 어느덧 삼 년. 친구들은 다 서울에 취업을 했지만, 나는 이사한 집 근처에 취직을 했다. 일을 하랴 저축을 하랴 주말에는 부쩍 건강이 안 좋아지신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랴,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다. 친구들은 잘도 놀러 다니는데 나만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내 나름대로 장녀의 책임을 다 하고 있는 것이 뿌듯하기도 했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즐겁게 술잔을 기울이며 속 얘기를 털어놓은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만나지를 못하다 보니 연락이 뜸해지는 것도 당연지사. 서운하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끔, 간절곶에서 보았던 소망 우체통이 생각났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해가 빨리 뜨는 곳이라 해서 찾아간 간절곶이었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소망 우체통이었다. 사람 키보다 훨씬 더 큰 그 우체통을 보며 나는, 저 안에는 얼마나 많은 사연들이 담겨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 머릿속에 차 있는 이 그리움들을 모두 보내려면, 역시 그 우체통에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문구점에 가서 편지지 몇 묶음과 펜 한 세트를 산 것이었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조우는 특별해야 했다. 휴대전화를 통해 께적께적 내 소식을 알리고 싶지 않음이 첫째요, 인간관계에 조금은 진지해져 보고 싶은 마음이 둘째였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의 네 권의 졸업앨범을 모두 펼치고, 편지를 쓰고 싶은 사람들의 이름과 주소를 편지봉투에 옮겨 적었다.
초등학교 때의 친구가 세 명, 중학교 때의 친구가 다섯 명, 고등학교 때의 친구가 열한 명, 그리고 대학교 때의 친구가 열일곱 명. 손을 꼽아 몇 명인지를 세며, 세월이 흐르면 잊혀 진다는 게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유경이에게. 안녕, 나 신윤지야. 나이를 두 배는 먹었으니까 내가 기억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사학년 때 네 짝이었던, 빨간 실내화 가방 주인 말이야…….’
‘민지에게. 안녕, 나 윤지야. 난 아직도 우리 학교 앞에 있던 떡볶이 아주머니의 얼굴이 기억 나. 혹시 아직도 그 가게가 있니? 너랑 다시 그 곳에 가고 싶다. 내 사춘기 때의 기억들은 다 거기에 있어…….’
‘윤수에게. 안녕, 나 윤지! 잘 지내지? 고등학생 때에는 그렇게 날 쫓아다니더니, 연락이 없는 걸 보니 대학 가서 예쁜 여자 친구라도 생겼나봐? 하긴, 지금 생각해보니 너도 꽤 인기가 있었지. 하지만 그래도 넌 내 친구야, 그냥 친구. 네 동생도 이제 대학생이겠구나. 어렸을 때 진짜 귀여웠는데…….’
‘현경이에게. 야! 어떻게 이 년 동안 연락이 없을 수가 있어? 얼굴도 잊어버리겠다야. 내가 그 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기나 해? 나 이제 쉬어. 그러니까 이거 받으면 빨리 전화 해. 내가 이미 너희 집 앞에 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긴장하고. 아, 그리고 언제 한 번 같이 윤 교수님 뵈러 가자. 윤 교수님이 우리 진짜 예뻐하셨잖아. 설마 벌써 다른 애제자가 생기신 건 아니겠지? 그럼 진짜 서운할 것 같아…….’
편지를 쓰며 나는 예상보다 많은 후회를 했고, 예상보다 많은 그리움을 느꼈다. 편지지 한 장씩에 꾹꾹 눌러 담은 기억들만큼이나 말이다. 마지막 편지에 마침표를 찍으며, 나는 대나무밭에서 목청껏 소리를 내지른 이발사처럼 후련해졌다. 내 앞에, 못 다한 이야기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봉투 하나하나를 밀봉해가는 동안, 흐린 가을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내일은 소망 우체통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