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원릉] 역대 최장기간 재위로 조선의 중흥기를 이끌다, 영조, 국내여행,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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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릉-원릉] 역대 최장기간 재위로 조선의 중흥기를 이끌다, 영조


44세. 바로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평균수명이다(실록 기준). 조선팔도의 산해진미를 먹으며 아름다운 여색을 마음대로 부리고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던 자리에서 조선의 역대 임금은 왜들 그렇게 짧게 살다 갔을까. 아마도 높은 칼로리의 음식, 부족한 운동량, 새벽부터 시작되는 신하들과의 경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예상한다. 것이다. 호화로운 생활이 오히려 독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역대 임금들의 단명(短命)을 비웃으며 역대 최장기간 옥좌의 자리에서 군림한 왕이 있다. 바로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英祖, 1694~1776년)이다. 1724년부터 1776년까지 52년이라는 최장기간 왕위를 지킨 영조는 살기도 가장 오래 살았다. 무려 83세(1694~1776년). 오늘날과 비교해도 장수(長壽)한 편에 속한다. 오랜 그의 재위 기간만큼이나 영조가 남긴 발자취를 되돌아보기 위한 시간 또한 오래 걸렸다. 

                    
                

조선왕조 500년 중 반세기를 호령하다 

  • 영조와 정순왕후의원릉은볕이 잘 드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원릉은 볕이 잘 드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계비 정순왕후와 함께 원릉(元陵)에 잠들어있는 영조는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의 둘째 아들(연잉군)로 태어났다. 후사가 없는 경종에 이어 왕이 된 영조는 자신의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함이었을까. 올바른 정치를 위해 그는 안간힘을 썼으며, 당쟁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주저 없이 칼을 빼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당의 이익을 위해서는 왕실의 권위마저도 무시했던 신하들로 인해 이복형제 사이였던 경종과는 서로 반대파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경신환국으로 몰락한 남인의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은 소론의 지지를,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았다. 결론적으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한 장희빈의 소론 세력을 누르고, 노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더는 당쟁에 놀아나기 싫었던 영조였다. 그가 꺼내든 카드는 탕평책이었다. 노론과 소론의 우두머리를 불러 놓고 탕평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축출하여 국왕 중심의 정국을 운영하였다.

군역에 있어서도 과감한 개혁을 실시했다. 종래 한 사람 당 2필씩 징수하던 군포를 1필로 줄이고 균역청을 설치하여 군역을 면제받고 있는 양인을 찾아내 그들에게 군포를 징수하였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병역기피자를 색출해내는 작업을 한 것이다. 법제 정비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아 《경국대전》 중에서도 시행 가능한 법령을 간추려 《속대전》을 편찬하였다. 형벌에서도 가혹한 방법보다는 폐단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조치를 했는데 다리뼈를 으스러트려 최대한 고통을 주며 서서히 죽이는 압슬형(1725년 폐지), 벌겋게 달군 인두로 얼굴을 지지는 낙형(1732년 폐지) 등을 금지하였다. 

 

  •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가면 정자각과 원릉이 나타난다.

    잘 다듬어진 길을 따라가면 정자각과 원릉이 나타난다.

거침없는 국정운영만큼 영조 자신도 절제와 검소한 생활을 습관화했다. 다른 임금들은 12첩 반상의 수라상을 하루 5번 먹었던 것에 반해 그는 굶주리는 백성을 생각해 반찬의 가짓수를 반으로 줄이고 현미와 잡곡을 섞은 밥상으로 하루에 3번 식사를 했다고 한다. 곡식을 빚어 만드는 술 또한 멀리하여 세조나 연산군처럼 술에 관련된 일화가 많은 것에 비해 영조는 술과 관련된 일화를 찾기 힘들다.

역대 임금 중 가장 오랜 세월을 왕위에서 보낸 만큼 영조는 조선의 중흥기를 이끈 왕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그와 함께 조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되는 정조와 같이 성군(聖君)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도세자. 그의 아들이자 그가 성군(聖君)으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유다. 탕평책을 통해 당파의 균형을 꾀했지만, 노론으로 왕위에 오른 영조에게 소론이 가지고 있었던 불만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씨와도 같았다. 결국,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윤지(尹志)등 소론이 주도하여 일어난 ‘나주벽서사건’과 이어진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사건’은 영조의 업적에 옥에 티라고 하기엔 너무 큰 티끌이 되었다.     


[트래블아이 왕릉 체크포인트]
동구릉 내에 위치한 원릉(元陵)은 사실, 여주로 옮겨진 효종의 영릉(寧陵)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영조 또한 여기가 아닌 자신의 원비인 정성왕후가 잠들어 있는 서오릉의 홍릉(弘陵)에 묻히기를 바랐는데 다름 아닌 정조가 이곳에 능지를 정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뭘까?

본래 원릉(元陵)의 자리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물이 고이는 흉지였다고 한다. 영조 또한 죽기 전 직접 묫자리를 정하고 정성왕후와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의 친아버지를 한여름에 뒤주 속에서 굶어 죽게 한 장본인을 편히 잠들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 살아있는 왕의 마음을 읽은 신하들은 죽은 왕의 유지를 무시하고 세 치 혀를 놀리며 지금의 자리를 추천하게 된다. 흉지가 길지가 되어 으뜸 원(元)자를 쓴 원릉이 된 것이다.

묫자리는 좋지 않지만 능역에 자리 잡고 있는 망주석과 장명등은 무덤 주인의 이름을 닮아 화려하다. 망주석의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는 그 당시 기술과 비교하면 상당히 세련되고 화려하다. 장명등 역시 날렵한 팔작지붕의 곡선을 자랑하며 섬세하게 새겨진 모란 무늬가 돋보인다. 영조의 재위 기간 동안 분명하게 드러난 명암처럼 그가 잠들어있는 곳 역시 화려함과 어둠이 존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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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년동안 조선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영조는 어떤 고통이 있었기에 아들을 뒤주에 넣었을까요?

트래블투데이 심성자 취재기자

발행2021년 12월 11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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